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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치즈볼
|
**니콜라 테슬라 (Nikola Tesla)**

출생 ~ 사망 : 1856년 7월 9일 (크로아티아) ~ 1943년 1월 7일
학력 : 프라하대학교
경력 : 1891년 테슬라 변압기 제작, 1888년 회전자기장법칙


크로아티아출생으로 20c기 최고의 과학자이다.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져 그의 존재가치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당시 최고의 과학자 에디슨보다도
사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발명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려는 에디슨과 달리 니콜라 테슬라는 발명자체의 즐거움을 찾았다.
28세의 나이로 에디슨 회사에 들어간 니콜라 테슬라 거기에서 에디슨이 사용하고 있는
직류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 교류시스템을 바꾸자 주장했다.
하지만 에디슨은 새내기인 니콜라 테슬라의 그러한 주장을 새겨 듣지 않고 계속 직류시스템을 사용했다.

하지만 후에 니콜라 테슬라의 주장대로 교류시스템이 월등이 좋다는 결과가 나온다.
유도전동기발명, 교류발전기, 변압기, 전동기 등의 특허를 가지고 있고, 테슬라코일 발명했다.
무선에너지전송기술 연구했고, 세계 최초로 나이아가라폭포에 교류발전소를 책임지고 설치했다.
또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 바로 그가 발명의 모태가 된것이다.
당시 이러한 발명을 했을 때 누구도 그를 믿지않았던 사람들.. 그는 정말 시대를 잘못 만난 과학자였다.
이러기에 인생자체가 참으로 외롭고 불운한 그많은 발명을 했지만 많은 유명한 과학자가
그의 발명품을 훔쳐가기 일쑤였고...

에디슨 또한 그러했다고 한다. 노년기 돈이 없어서 약을 사먹지 못했고 가족이 없고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정해서 정신병까지 들었던 니콜라 테슬라 노벨상에 니콜라 테슬라와 에디슨 공동수상을 하기로 했지만...
니콜라테슬라는 무엇때문인지..노벨상을 사양하고 만다.
현 미국과학자 85%가 니콜라 테슬라 전기문을 읽고 과학자가 되리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많은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해 정말 안타깝다.
발명을 수익이 아닌 발명자체의 즐거움을 찾았던 니콜라테슬라 그는 진정한 과학자이다!

[USS Eldridge]


필라델피아 실험(Philadelphia Experiment)이라 불리는 이 실험은 워낙 유명한 얘기라
이곳 저곳에서 들어보았을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다시 소개하는 것은 최근 프레스티지 영화를 통해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이다.

1943년 행해진 이 실험의 최초 목적은 '투명' 배를 만드는 것이었다.
적군의 시야, 레이더에서 벗어나 항해를 하기 위한 것으로, 그 이론의 바탕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통일장 이론이 깔려있다. 통일장 이론은 전자기, 중력 등
힘의 근본이 사실상 하나의 공식으로 서술할 수 있는 것으로 자유로운 전환이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여튼 이론은 충분한 장비와 에너지만 갖추고 있다면 목표 주변의 빛을 구부려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 중이였던 당시 상황에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장비는 충분히 고려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해군은 실험에 많은 돈과 자원, 그리고 실험에 쓸 구축호위함 USS Eldridge를 투입하게 된다

실험은 1943년 여름 시작되었고 어느 정도 성공적이였다고 볼 수 있다.
1943년 7월 22일 필라델피아항구에서 행해진 첫번째 실험에서 거의 완전하지는 않지만
시야에서 사라지는 목표는 달성했다. 대략 '녹색 안개' 덩어리 정도의 모습으로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승무원들은 심각한 구역질로 불평했으며,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만큼 단순히 레이더에서
벗어나는 정도로만 수정하게 된다.

재정비한 장비를 가지고 10월 28일 두번째 실험을 시도한다.
두번째 실험에서는 거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상태에 까지 도달했다가 푸른빛과 함께
시야에서는 물론 레이더에서도 사라졌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항에서부터 600km 떨어진
노퍽에 나타났다가 다시 필라델피아 항으로 돌아왔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순간이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실험의 결과는 끔찍했다. 대원의 일부는 사망, 실종 그리고 일부는 갑판의 철제구조물에
융합되어 죽어있었다. 나머지 대원들 역시 심각한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 분열증에 걸렸던 것이다.
이 참혹한 결과에 해군은 즉각 실험을 중단하고 관계자들의 입을 막는 한편
실험에 참가했던 대원들을 세뇌하여 실험을 은폐하였다.

여기서 테슬라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실험의 1차 책임자가 테슬라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검증된 사실이 아니고, 필라델피아 실험 자체도 진짜로 행해졌다는 증거가 없다.
처음 이야기가 나온 것은 Morris Jessup이라는 아마츄어 천문학자이자 UFO연구가였던 사람이
과거 실험에 참가했다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몇 장의 편지에서부터 흘러나온 이야기이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내용이었기에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으며
1990년에 영화 The Philadelphia Experiment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레인보우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투명/스텔스 등을 목적으로 행해진 프로젝트였다

전자무기의 창시자, 니콜라 테슬라 알려지지 않은 천재 과학자
현대사회에서 전기라는 것은 인간생활과 분리시킬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 전기의 발전에는 에디슨을 위시해서 패러데이, 헤르츠, 볼타 등등 많은 과학자들의 공헌이 있었지만
전기발전에 누구보다 큰 공헌을 하고도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19세기 후반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가 이 세상에 나왔을 때는 지금과 비교해
전기가 매우 원시적인 상태였다. 기초적인 전기이론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지만
직류전기밖에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전기는 배터리에서 생성되는 전기 외에는
대부분이 교류전기다. 교류전기가 보편화되기까지의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는데,
교류전기는 그 이론에서부터 실용화까지 완전히 테슬라의 공적이었다.

이것만이 테슬라의 업적은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그의 이론과 발명품들이 너무도 많다.
만약 그의 업적이 교류전기 하나로 그쳤다면,
우리는 지금 전기에 관해 에디슨보다 테슬라를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은 언뜻 듣기에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그의 업적이 한두 가지에 그쳤다면 잘 알려졌겠지만 너무 크기 때문에 우리가 모른다니,
납득하기 어려운 말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고, 인간세상에서는 이런 모순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을
테슬라의 경우를 보고 재차 확인하게 될 뿐이다.
그의 발명품들은 대단한 것들이었지만, 누군가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자기네들만의 무기로 사용할 만한 가공할 위력을 가진 것이기에
세상에 숨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류를 위해 좋은 발명을 하고도 매장된 이가 테슬라만은 아니겠지만,
테슬라의 경우는 전자기파 비밀무기와 너무나 중요한 관련이 있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테슬라는 역사 속에 묻혀 버린 무명의 여느 과학자가 아니다.
이 사람은 제2의 산업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란 소리를 들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는 마차 시대에 살면서 달에 로켓을 보낼 수 있는 것 이상의 미래를 개척한 과학자였다.

그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을 산 사람이지만, 21세기인 지금에도 세상 사람들이 아는
최첨단 과학기술보다 훨씬 더 앞선 과학을 만들었다.
과학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90여 년 전에 녹음기, 마이크로피쉬, 홀로그램, 팩스 따위의
필연적 발명을 예견했고, 1928년에 이미 텔레비전 설계도를 잡지에 발표했으며,
3차 세계대전 이후에 올 것으로 예상한 미래사회를 묘사한
<랄프124C41+>라는 소설을 쓴 휴고 건스백(Hugo Gernsback, 1884~1967)은
이런 테슬라를 가리켜 인류 역사상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과학자라고 평했다.

아르키메데스나 패러데이 또는 에디슨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발명이란 것이 이미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을 토대로 만든데 비해서
니콜라 테슬라는 두 번 다시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과학을 창조했다.
그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과학자일 뿐 아니라
미래에도 그를 능가할 과학자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대담무쌍한 담력으로 이룩한 기초지식과 혁명적인 과학 발견은
지식세계에서 또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위대한 과학자가 어째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소개하는 테슬라의 자취는 수박 겉핥기 밖에 안되지만,
읽어 가면서 그 원인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누군가 조작하고 왜곡한 사실을 절대 진리이자 진실의 역사로 믿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현대의 인류문명은 전기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우리가 그 전기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발명왕 에디슨 덕택이라고 흔히들 알고 있다.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의 에디슨관에는 이런 에디슨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품들이 가득하고,
그곳은 항상 방문하는 이들로 붐빈다.
물론 에디슨이 훌륭한 발명가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또 하나의 커다란 역사 왜곡일 뿐이다. 그는 과학자로 알려졌지만,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과학자보다는 사업가로서 더욱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직접 발명했다는 수많은 발명품은 대부분 그가 채용한 고용인들이 발명한 것으로,
특허를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했기 때문에 기록상 그의 발명품으로 알려진 것뿐이다.
여기서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는가.
테슬라의 과학지식과 발명품은 에디슨이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위보다 몇 차원 더 앞선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에디슨이 사실 이상으로 과대 포장되어 영웅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의문을 뒷받침해 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미국 미시건 주 앤아버의 초등학교 교사인 와그너(John Wagner)는 3학년 학생들에게
테슬라에 대해 가르치고 그의 이름을 되살리기 위해 구리로 만든 그의 흉상을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해 줄 것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테슬라가 받은 특허번호와 모터가 에디슨관에서 에디슨의 흉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어
관람객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동상은 박물관에 진열되지 못하고 예일대학에 진열되었다.
이들의 요청에 의해 레빈(Carl Levin)이란 상원의원이 압력을 넣어 겨우 남자화장실 옆 복도
어두컴컴한 구석에 테슬라의 유물이 담긴 작은 유리상자 하나가 진열되었을 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발간한 <발명책(The Smithsonian Book of Invention)>에도
니콜라 테슬라라는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이 책에는 에디슨이나 경질고무 발명가인 굿이어(Charles Goodyear)를 위시해 전동칫솔이나
자동토스트기의 발명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요리법을 특허낸
샌더스(Sanders)대령 같은 사람까지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테슬라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미국 고등법원에서 라디오 발명가는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가 아니고 테슬라임을
오래 전에 판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코니가 라디오 발명가로 소개되고 있을 정도이다.
일련의 사건들로 볼 때 이것은 고의적인 행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니콜라 테슬라는 세르비아 혈통으로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스밀리얀이라는 곳에서
1856년 7월 9일 태어나 1943년 1월 7일 미국 뉴욕에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태어난 19세기 후반 동유럽은 터키가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세르비아 정교회의 신부인 아버지로부터 지적인 지도를 받았고,
학교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지혜로웠던 어머니에게는
세상의 근본원칙과 인간의 기본적 도리를 배웠다.

그가 어머니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수학자이자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훌륭한 음악가였고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피아노 연주를 즐겼으며, 세르비아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가장 친한 문학가이며 언론인이었던
친구 부인과 죽을 때까지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었고,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나 음악가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y) 같은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고 심지어는 이들과 동업하여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그가 다섯 살 때 만든 물레방아가 있다.
그 물레방아는 보통 시골 농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물레방아가 아니었다.
그것은 걸름막이가 없고 밋밋한 것이었지만, 물의 흐름에 따라 일정한 속도로 돌아갔다.
훗날에 그는 같은 원리로 날개 없는 터빈을 발명했다.
그의 시도가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지붕 위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에 각도를 맞춰 우산을 폈고,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 그는 분명히 우산을 이용하면 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몸을 날렸다.
그러나 땅바닥에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그를 그의 어머니가 방으로 옮겨야 했다.

또 한번은 풍뎅이를 잡아서 엔진을 만든 일이 있다.
16개의 가는 막대기로 부챗살 모양의 수레바퀴를 만들어
가운데 축을 고정하여 가볍게 돌게 하고 각 살 끝에 풍뎅이의 발을 풀로 붙였다.
한 방향으로 향한 16마리의 풍뎅이들이 날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
수레가 돌아가는 엔진을 고안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이웃의 한 친구가 찾아와 병 속에 가득 잡아 놓은 풍뎅이들을 마구 먹어 치워 버렸다.
그것을 보고 니콜라는 그 다음부터는 아예 이런 발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시인으로서도 대단한 경지에 있었다.
스티아치치(Stjiacic) 라는 세르비아의 한 신부가 세르비아 연방의 젊은 작가시절
처음 미국을 방문하여 시카고 공립도서관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그 도서관에서 당시 유명했던 세르비아 시인 즈마이-요반(Zmai-Jovan)의 시집을 찾은 그는
번역자가 니톨라 테슬라임을 확인했다.
훗날 스티아치치 신부가 라도 박사의 안내로 메트로폴리탄 빌딩 20층에 있는 테슬라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테슬라씨, 당신이 시에도 능통한 줄은 몰랏습니다.” 했더니,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매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세르비아 사람들 중에는 노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에디슨, 마르코니, 테슬라 그는 체코의 프라하 대학에서 본격적인 전기기술 교육을 받았다.
그후 부다페스트의 전화회사에서 일하면서 자기감응모터를 착안하여 거의 완성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파리로 직장을 잠시 옮겨 에디슨과 절친한 ‘베첼러’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베첼러는 에디슨이 24세에 처음 회사를 차릴 때 고용되었던 기사였으며
에디슨이 프랑스에 파견해 유럽 대륙에 세운 ‘대륙 에디슨 회사(Continental Edison Company)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에디슨 회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세계적인 회사였다.
테슬라는 주변에서 천재로 인정해 주는 기술자였을 뿐 아니라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으므로 문제 해결사로 여러 곳에 파견되었다.

1880년대는 새로운 과학의 이기인 전화를 가설하는 것이 각 국가의 커다란 사업이었다.
그가 일하던 파리의 회사는 에디슨 회사와 함께 독일에 전화시설을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알사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전화 설치를 끝내고 개통식 행사를 하기 위해
황제 빌헬름 1세가 참석한 자리에서 전화선이 누전으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독일은 이것을 고의적인 사고로 오해했고, 프랑스와의 정치관계까지 악화시키고 말았다.
그 여파로 테슬라가 일하던 프랑스 회사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계약을
파기당할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해결사로 파견된 테슬라는 기존 시설을 자기가 고안한 감응모터의 원칙을 이용한
교류전기로 바꾸어 송전하는 시설로 대치하여 모든 문제를 훌륭하게 해결했다.

당시 전기는 반 마일 이상을 송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직류뿐이라고 여겨지던 때였다.
테슬라는 이러한 직류의 단점에 착안하여 거리에 관계없이 송전할 수 있는 교류방식을 생각하고
그 방법을 제시했으나 아무도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던 터에,
이러한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발명을 증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에디슨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어
테슬라의 공은 에디슨에게로 돌아갔고,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건진 장본인은 결국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교류문제는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져 버렸다.

테슬라가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약속한 돈을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베첼러는 테슬라에게 미국으로 가서 에디슨 밑에서 일하면서
그를 통해 교류전기를 상용화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면서 에디슨에게 소개편지를 써주었다.
1884년 테슬라는 돈 몇 푼과 책 몇 권, 반중력 비행기 설계도와 즐겨 쓴 시집,
자신의 학술논문집, 가장 중요한 베첼러의 소개편지를 들고 미국에 도착했다.
그 편지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두 사람의 위대한 사람을 압니다.
하나는 에디슨 당신이고, 다른 하나는 이 편지를 가져가는 테슬라라는 젊은이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미국에 도착한 테슬라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겨우 차비를 충당하여 에디슨이 있는 뉴저지로 가서
소개장을 그에게 보여주게 되었다. 에디슨은 편지를 읽고 곧 테슬라를 채용했다.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에디슨은 당시 직류발전기인 다이나모 발전기를 개량하여 효율을 높이고 고장 빈도를 줄여
발전단가를 낮추려고 고심하던 중이었다.
이를 본 테슬라는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에디슨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만일 그 일을 성공하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에 테슬라는 밤잠을 설쳐가며 여러 날 일한 끝에
에디슨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월등한 기계를 만들어 냈다.
에디슨은 물론 이에 대만족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약속한 5만 달러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결국 돈 이야기를 꺼낸 테슬라에게 에디슨은 그것은 농담이었다고 하면서
테슬라가 아직 미국의 대화방법을 습득하지 못했다며, 그의 어깨를 두두리며 깔깔대고 웃었다고 한다.
테슬라는 이 때문에 대단히 실망하고 좌절감마저 갖게 되었다고 후에 술회했다.
그럼에도 테슬라는 계속 교륙전기의 개발을 종용했다.
그러나 끝까지 직류가 우월하다고 믿은 에디슨은
굳이 교류전기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완고한 태도를 유지했다.
에디슨에 대한 많은 실망으로 그를 통한 교류전기의 발전계획을 단념하게 된 테슬라는 에디슨을 떠났다.
후일 그는 에디슨을 평하여 “에디슨은 볏짚 속에 바늘이 떨어지면 지체하지 않고 볏짚 하나하나를
뒤지기 시작해서 찾을 때가지 꿀벌처럼 일할 사람이다.
나는 약간의 이론과 계산법으로 그가 들이는 노력의 10퍼센트만으로 원하는 것을 찾는 법을 알기에
그의 아둔함을 측은하게 여겼다.”라고 말했다.(New York Times, October 19, 1931)

그 당시는 에디슨의 유명한 백열전등이 각광을 받고 많은 돈을 벌어들이던 때라
백열전등 이외에 다른 방법을 통한 전등을 발명해 보려고 애쓰던 과학자들이 많았다.
테슬라는 이미 아크전등을 발명하여 특허를 낸 후라 몇몇 회사로부터 함께 사업하자는
제의를 받았으나 역시 실권과 이득은 모두 그 사람들이 갖고 자신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게 되었다.
이때 에디슨과 같은 나이의 젊은 전기기술자이며 사업가적인 기질과 자본을 갖춘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의 사주 ‘조지 웨스팅하우스’를 만나게 된다. 그는 테슬라의 교류전기
이론에 심취하고, 그 역시 교류전기만이 유일한 전기보급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난에 시달렸던 테슬라는 조지 웨스팅하우스로부터 100만 달러의 제의를 받고 그때까지 등록한
모든 특허들을 웨스팅하우스에게 팔았다.
이때부터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의 직류, 교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학계에서도 이미 익숙해진 직류의 장점을 고수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교류의 장점을 이해하여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역사상 처음으로 시카고 ‘세계박람회’가
1893년 5월 1일에 열린 것이다.
박람회장에는 25만 개의 전등이 켜질 예정이었고,
당연히 각 전기회사들은 이 일을 따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되었다.
결국 낙찰을 받은 회사는 테슬라의 기술을 사들인 ‘웨스팅하우스’였다.

당시 에디슨은 전등 당 18.5달러에 입찰했고 웨스팅하우스는 4.32달러에 입찰했다.
이를 계기로 웨스팅하우스는 박람회장 내에 테슬라의 ‘다상자기감응’ 원리를 이용한
발전기를 설치하고, 직류발전기로는 이런 싼값에 전기보급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여러 개의
직류발전기를 설치하지 않고도 장거리를 전깃줄로 송전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교류를 실용적인 전기로 완전히 인식시켰던 것이다.
이 일은 교류가 직류를 능가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고, 에디슨의 직류를 향한 아집도 막을 내리는
사건이 되었다.
1880년대 이후 전기분야 발전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많은 과학자들이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을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폭포 가까이에 있는 버팔로 시민들도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버팔로까지의 거리가 22마일이나 되어 직류로는 송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던 중 시카고 박람회에 이어 독일에서도 삼상 교류발전기를 이용해 108마일 떨어진 곳까지
송전이 가능해지자, 점차 사람들은 버팔로뿐만 아니라 뉴욕시까지도 송전할 수 있고
실상 거리에 제한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시카고에서 그것을 증명한 웨스팅하우스사가 공사를 맡아 1895년 4월 20일 버팔로시 가정들은
전기등불을 켜게 되었고, 이후 값싼 에너지와 전기를 이용한 여러 산업이 버팔로시에 몰려들게 되었다.

즉, 일종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리하여 1903년에는 세계의 모든 발전소가 테슬라의 원리를
이용하여 교류전기를 만들게 되었다. 그는 또한 공명(共鳴)과 관련하여 지대한 발명을 했다.
그는 여러 형태로 시범을 보였지만 사람들은 보고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중에 하나가 신문기자들 앞에서 보여준 시범이다.
그는 100톤을 견딜 수 있다는 두께 5센티미터, 길이 61센티미터, 폭 30센티미터 철판의
양끝을 고정시켜 놓고 그 위에 탁상시계 크기의 전기진동기를 올리고 한참을 조정했다.
잠시 후 철판과 진동기의 주파수가 서로 맞았을 때 철판이 떨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정도가 심해져
결국 철판은 부러지고 말았다.
이를 목격한 벤슨(A. L. Benson) 기자는 아무리 큰 망치로 두들겼어도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테슬라는 이어 뉴욕의 고층빌딩 건축장에 가서도 이 조그마한 진동기를 철근에 부착시켜
그 위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지진이 난 줄 알고 혼비백산하게 만든 일도 있다.
그는 이 원리를 원격지구 역학진동(telegeo dynamic oscillation) 이라고 명명했는데,
이 원리를 이용하면 적 잠수함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고, 지하 광맥을 찾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지구도 쪼갤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X-레이도 처음 만들었다.
1895년 12월 독일의 렌트겐(Wilhelm roentgen) 교수가
X-레이의 발견과 유용함을 발표하였을 때
테슬라는 자기가 이미 X-레이를 이용하여 머리를 찍은 사진을 렌트겐에게 보냈다.
렌트겐은 이를 숨기지 않고 큰 관심을 표명하면서 일반에 공개했다.
이 때문에 테슬라는 유명해져 잡지사에 기고도 여러 번 하게 되고 강연도 하게 되었다.
테슬라는 렌트겐 박사에게 영광을 돌리면서도, 그 위험성도 함께 경고했다.
테슬라의 밑에서 지도를 받으며 잠시 공부한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는
1900년 12월 21일 영국의 콘월에서 캐나다 뉴파운드랜드로
짧은 파장을 이용하여 ‘S'라는 글자 하나를 송신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인해 ’마르코니‘는 무선통신의 선구자와 영웅이 되어 라디오의 발명가로 판정이 되었고,
대단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2년 전인 1898년 테슬라가 이미 무선통신 라디오의 원리를 특허낸 일이 있었다.
테슬라가 이에 대해 고소하여 승소했으나, 일단 유명해진 마르코니의 인상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고, 재벌을 배경으로 한 언론 덕택에 마르코니가 테슬라의 기술을 슬쩍
가져갔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테슬라도 이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자기가 그때 실현시키려고 했던 방법이 잘 설비된 철로에서 달리는 호화여객차라고 한다면,
대기를 매체로 짧은 파장을 이용한 마르코니의 방법으로 알려진 그 방법은
마치 촌길을 가는 두 바퀴 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고 신문기자들에게 설명했다.

마르코니의 이 방법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통신방법이며, 100여 년 전인 그때
테슬라가 말한 방법은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소개되지 않았다.
그때 테슬라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마르코니의 대기를 통한 송전방법은 대기 상태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거리를 고려해야 하며 전파는 대기의 상태 여하에 따라
많은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방법은 긴 파장을 이용한 저주파로 지표면을 사용하므로
거리의 제한이나 기후조건에 의한 제약이 전혀 없다고 했다.
마르코니가 짧은 파장으로 무선통신과 라디오를 개발하고 있을 때
테슬라는 롱아일랜드에 ‘워든클리프 타워’를 세우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자기가 말한 방법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시대를 앞선 발명- 테슬라는 1899년과 1900년 사이 약 1년간 그의 변호사의 배려로
콜로라도 주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가 있게 되었다.
이 도시에서는 크나큰 기대를 가지고 그를 환영했으며 그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그는 높이 51미터, 직경 18미터나 되는 탑을 건설하고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게 된다.
이 실험을 통해 많은 분야에 확신을 가지게 된 그는 1900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J.P. 모건의 경제적인 후원을 약속받고, 유명한 ‘워든클리프 타워’를 계획하게 된다.

테슬라가 여기에서 발표한 중요한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지구는 표면이 한 극이 되고 또다른 한 극이 전리층
(電離層, 지상 40~400킬로미터 정도에 형성된 기류층)이 상호 작용하는
거대한 전기적 공명체(resonator)이다.

● 지구 자체는 엄청난 전기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도관을 연결하듯이 뽑아서 쓰는 기구만 만들면 무료로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

● 무선전기 전송 시스템은 지구표면과 전리층에 있는
기본전파 혹은 고정전파 형태의 에너지를 활용하여 전송할 수 있다.
테슬라는 1901년 초부터 롱아일랜드에 지상높이 57미터, 지하깊이 37미터의 탑에
직경 21미터 무게 55톤이나 되는 버섯모양의 금속관을 씌운 워든클리프 타워의 착공에 들어갔다.
그는 이 탑으로 전기는 무제한으로 무선전송할 수 있고,
방송국 역할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누구나 필요할 때 아무데서나 무제한의 전기를 아주 싼값에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심한 육체노동의 사슬에서 풀려나 평화와 번영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자기 실험실에서 26마일 떨어진 곳에 전깃줄 대신에
땅을 통해 전기를 보내 200개의 전등을 켜보였다.
그러나 후원을 약속한 모건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착공에 들어가 이미 기술자들까지 채용한 테슬라는 특허이익의 51퍼센트를 모건의
소유로 한다는 조건으로 15만 달러의 착수금만 겨우 받았을 뿐이었다.

결국 ‘워든클리프 타워’ 공사는 좌절되고 이에 따른 경제적 압박이 테슬라를 괴롭혔다.
그의 이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다만 몇 명의 돈 없는 친구들만이
그를 위로해 주었을 뿐이었다.
모건이 지원을 중단한 이유가 자신이 요구한 시설비가 마르코니가 제시한 것에 비해
너무 많아 경제적으로 수지 타산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듣고
테슬라는 마르코니의 목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돈이 많이 드는 것이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은 결코 아니라고 설명했다.

테슬라에 따르면 ‘워든클리프 타워’는 모든 종류의 전신과 음성과 글자를 자유자재로
세계 어느 곳이든 무선으로 보낼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전화와 전신 송신소들의 설비를 개조하지 않고도
모두 연결시켜 줘서 전화 가입자는 전화 하나로 세계 어디서든 통화가 가능하며,
같은 원리로 수신기만 가지고 있으면 육지나 바다에 관계없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다른 곳에서 들려주는 음악이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지구 자체가 거대한 도체이기 때문에 당시 유선으로 가능한 일의 대부분이 무선으로
가능하게 된다는 뜻이다.

테슬라는 공사 좌절 이후 특히 1905년 이후에는 이렇다 할 일을 해내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아무도 그에게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에 그는 1907년과 1908년에는 심리적으로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었다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그는 쉬지 않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기록하여 여러 개의 트렁크 속에 넣어
약 20여 군데에 분산 보관했다.

그가 살던 뉴욕 가버너 호텔에는 1만 달러를 들여 만든 금고까지 있었다.
그는 1943년 1월 7일 아무도 없는 방에서 외롭게 숨졌고, 시체는 호텔 청소부에게 발견되었다.
그가 미국에 온지 59년이 되는 해였다.
그가 죽자 FBI는 외국인 자산관리소를 시켜 그의 모든 소지품을 차압했다.
이에 대해 테슬라를 추모하는 단체들은 그가 남긴 모든 자료를 가져갈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이 길뿐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10년 후에야 유고슬라비아에 사는 그의 조카가
상속권을 인정받고 남은 물건들을 돌려받았다.
이 유물들은 지금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테슬라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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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 통신

테슬라의 무선송전 주장에 대해 당신 많은 과학자들이 그의 천재적인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무선송전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많이 했다.
1893년 시카고 세계박람회에 테슬라는 처음으로 교류방식으로 박람회장 전체에
전기를 공급했다고 언급했다.
당시 전기기계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독일 베를린 피지코 테크니컬 학회(Physico-Technical Institute)의
헬름홀츠(Herman von Helmholtz) 수석감사가 이 현장으로 구경을 왔다.

그는 테슬라에게 무선송전 방식에 관해 설명을 듣고, 이것이 대단히 실용적인 방식임을 인정했다.
또, 1897년 뉴욕에 온 영국의 켈빈 경은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무선송전 시범을 보고 너무나 놀라
“그렇다면 당신은 헤르츠파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테슬라는 이에 “물론 아니지요. 이것은 전류가 아니라 방사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까지 켈빈 경은 무선송전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직접 목격한 순간부터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1900년 1월 테슬라는 콜로라도에서 지구 어디든지 무선으로 통신을 할 수 있는 완벽한 기계를 만들었고,
사진을 세계 각지로 보낼 수도 있으며, 대기를 통해 음악도 보낼 수 있다고 서술했다.
1915년 10월 <타임>에 실린 테슬라 특집의 내용이다.
“테슬라는 목소리를 5천마일 이상이나 떨어진 곳에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리를 아주 깨끗하게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1899년 콜로라도에서 이미 보여주었다.
테슬라가 답답해하는 것은 15년이 지난 오늘(1915년)에도 사람들이 아직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중에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했다. 전화가입자들이 뉴욕시에 있는 전화교환소에
등록만 하면 세계 어디서든 같은 전화로 다른 가입자와 통화가 가능한데, 원리는 목소리를
담은 전류가 지각(地殼)을 통해 전화하는 지역에서 일단 무한의 속도로 시작하여 약 6천마일
지점에서 광속으로 늦추어졌다가 다시 빨라져 전화받는 지역으로 무한의 속도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 신기한 무선이란 것은 마치 폭풍이 불어오듯 인간생활에 찾아와 그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전 세계에 6개 정도의 무선전화 교환소만 있으면
목소리뿐만 아니라 영상까지 서로 교환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즉, 오늘날의 TV, 팩스 따위를 능가하는 것들을 1899년에 그는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1926년 1월 30일에 그가 호텔 객실에서 자기 신세를 한탄하면서 적은 글이 있다.

“모든 실체가 리듬을 가진 분자로서 전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두뇌처럼 작동하게 만드는
무선이 완전히 적용되는 날에는 인류는 거리 감각을 잊어버리고 즉각적으로 누구와도
교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원거리 전화(tele-phone)와 원거리 영상(tele-vision)으로
마치 얼굴과 얼굴을 맞댄 것과 다름없이 교신할 것이며……
그때의 TV전화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전화보다도 훨씬 더 간단해져서
사람들은 윗옷 호주머니에 그 TV전화기를 넣고 다닐 것이다…….

필경 가장 가치있는 무선 에너지의 원리를 적응시켜 만들 수 있는 이기(利器)는
연료 없이 현재의 비행기나 비행선이 가지고 있는 여러 한계를 벗어나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비행기의 추진력이 될 것이다…….
또 각 가정에 배달되는 종이신문 대신에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무선으로 각 가정에
신문이 직접 배달되어 집에서 인쇄된 신문을 읽게 되는 일은 꿈이라기보다 현실에
훨씬 가까운 이야기이다…….
그리고 자동차들의 주차문제와 겸하여 상용도로와 개인용무를 위한 도로를 별도로
사용하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벨트로 장치된 고층 주차장 빌딩을 세우고 도로는 필요한 대로 겹으로 증폭시키면 된다.
그러나 자동차와 바퀴를 날개로 대치하는 문명이 도래하면 그런 도로마저 결국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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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광선

1915년 테슬라는 5천만 볼트의 전기에너지를 무선으로 원거리에 보내 목적물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며, 자신은 이미 그 무선송신기를 만들었음을 증명할 수 있고, 이 기구는 세계 아무 곳이나
원하는 목적물을 정확하게 겨냥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도 황당하게 여겨져 그의 발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9년 후인 1924년 갑자기 세계 여러 곳에서 살인광선을 발명했다는
과학자들의 발표가 잇따랐다.
1924년 5월 19일 영국의 과학자 그린델매튜스(Harry Grindell-Matthews)는 파리에서 원거리의
비행기를 격추시킬 수 있는 가공의 전자방사선 기구를 발명했으며, 이 가공할 방사선
(한국어로 광선 또는 방사선이라는 것은 영어로 ray, 또는 beam을 말한다). ray를 흔히 ‘광선’이라고
번역하지만 ‘광선’이란 용어는 빛을 가진 선이란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반드시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radiation, 즉 방사(放射)하는 파(波)를 말하기 때문에 위에서 death ray를 ‘살인광선’ 또는
‘죽음의 방사선’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살인광선’은 빛이 없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선(beam)도 포함한다.)은 전 군대의 행동을
마비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의 발표가 너무 과장됐으며, 4마일이나 7~8마일 정도의
거리라면 몰라도 그 이상의 거리는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전 군대의 움직임을 마비시킨다는
말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그린델매튜스는 이미 독일군은 이러한 장비를 가지고 있다고 재반박했다.
그리고 같은 달 24일에는 독일의 과학자 볼레(Herr Wolle)가 독일은 ‘죽음의 커튼’이라고
부르는 전자무기를 세 개나 만들었다고 발표했으며, 다음날인 25일 미국의 과학자 월(T. F. Wall)은
전기에너지를 사용하여 무선으로 비행기나 자동차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기술을 특허신청하면서
같은 원리를 외과수술이나 다른 과학 부문에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5일 후인 5월 30일 그 전날 뉴욕에서의 발표를 인용한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신문에는
테슬라가 1900년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이미 발명한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선에 접촉되면
운행중인 비행기가 그대로 추락하게 된다고 설명한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만 있었지 실제로 사용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10년이 지난 1934년 테슬라의 78세 생일날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살인광선’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그 죽음의 광선은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서, 1억만분의 1센티미터에
불과한 이 방사선으로 250마일 거리에 있는 비행기 1만 대를 단번에 떨어뜨릴 수 있으며,
이 장치를 만드는데 드는 비용은 200만 달러 정도이며 건설하는데 3개월이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설명에 따르면, 미국 전역 12곳에 이런 기지를 설치하여 전자망을 치면 마치 중국에서
만리장성을 쌓아 국가를 보호하듯이 미국은 어떠한 외세의 침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방사선은 가스, 디젤, 오일 등 어떠한 연료를 사용하든지 관계없이 모든 엔진을 녹여 버리므로
이 방사선에 대한 방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방사선을 농축하여 사용하면 지나간 자리에 있는 군인이나 장비는 모두 삽시간에 죽고 파괴된다고 한다.
망원경의 조망권 내에서 또는 지평선의 범위 내에서 정확하게 목표를 겨냥하고 파괴하며,
소리도 없고 흔적도 없는 효과적인 무기라고 한다.

1935년 2월호 <리버티>지에 테슬라가 살인광선에 대해 간결하게 설명한 일이 있다.
“나의 발명에는 큰 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그 시설이 완공되면 200마일 이내에 접근하는 적의를 가진 사람이나 기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 파괴시킬 수 있다.
우리보다 강한 어떠한 적이 침략해 온다고 해도 이들을 막아낼 장막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는 계속해서 자기의 발명과 다른 사람들이 만든 살인광선과의 차이를 설명했다.
다른 사람들의 살인광선은 다량으로 만들 수도 없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급격하게 약해지지만
자신의 것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당시 뉴욕에서 소비되는 총 전력량이 200만 마력(15억 와트)이었는데 이 전력을
모두 사용해도 20마일 밖의 사람은 죽일 수 없는 미약한 양이었다.

후에 다른 과학자들은 테슬라가 말한 다른 살인광선은 그린델매튜스의 것과 비슷한
종류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린델매튜스의 살인광선은 높은 전류로 목표물을 타격하기 위해 자외선을 이용한 것이었고,
자외선 서치라이트의 성능 한계는 테슬라의 것에 비해 훨씬 약했던 것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벌써 20세기 초에 테슬라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이 이런 발표를 여러 번 했는데,
지금은 그 아이디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어린이 공상과학만화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때 소련의 고르바초프 수상과 대결하여 최신과학을 동원하는 소위
‘스타워즈’를 전개하겠다고 호언하던 그 과학은 과연 21세기의 최신 과학이었는가.
아니면 테슬라를 위시한 1920년대의 여러 과학자들의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또는 그때 그 자료들을 세계의 모든 정부들을 좌지우지하는 누상(樓上)의 엘리트들이 빼앗고,
지상에서는 그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없던 일로 만든 것인가?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로서는 나름대로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는 이 의문은 또다른 끝없는 질문과
상상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콜럼비아 대학에서 무기를 연구하던(현 워싱턴 DC에 소재한 국방분석 연구소 소속)
젊은 과학자 타운스(Charles Hard Townes)는 아주 짧은 초단파를 만들기 위해서 고심한 끝에
4년 만인 1950년에 메이저
광선을 만들었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1958년 하워드휴즈 항공사에서는 레이저 Emission of Radiation)> 광선을 만들었는데, 그렇다면 이 광선들은 이미 테슬라가 반세기 이전에
말하던 가공할 광선의 일종인가?

테슬라는 태양광선보다 50배 빠른 속도를 가진 빛을 개발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는 또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도 영상을 포함한 모든 통신이 가능하다고 했다.
요즘엔 레이저 하나가 TV 프로그램 2만 5천 개를 동시에 송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테슬라가 이미 개발했다고 말한 그 단계에 도달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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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등

테슬라는 에디슨의 백열전등을 아주 조잡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겼다.
그가 시범을 보인 전등은 성능이나 품질 면에서 훨씬 더 다양하고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전등을 상용화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비-헤르츠파 전등과 유사한 형광등이 반세기가 훨씬 지나서 세상에 선을 보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이 세상에는 그가 제시했던 전등이 소개되지 않고 있다.

또 그는 친구인 음악가 스토코프스키와 작가인 트웨인,
부호의 아들 전기기술자 해몬드(Jack Hammond Jr.) 등과 동업으로 회사를 만들어
전등은 물론 형광등을 이용한 사진기술을 개발하는 사업을 벌인 일이 있다.
이때 마크 트웨인이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형광등을 켜보이는 사진
(1894년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이 친구 테슬라의 실험실에서 전등을 손에 잡고 손수 실험을
해보고 있는 장면)이 지금도 남아 있어 테슬라가 에디슨의 백열등보다 훨씬 진보된 전등을
만들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테슬라가 자기 방에서 전깃줄 없이 불이 켜진 전등을 쥐고 있는 사진도 유명하다.
이는 100만 볼트라는 고압의 전류를 직접 자기의 몸을 통하여 전등이 켜지게 한 것이다.
이것이 테슬라가 개발한 또다른 전등 '동적전자감응전구‘(Electro Dynamic Induction Lamp)로
전깃줄 대신 감응으로 켜지는 전등이다.
21세기에 들어선 현재의 테크놀로지로도 상상하지 못하는 발명품인데,
이것을 테슬라는 1894년 특허까지 받아 놓았다.(U.S. Patent 514170)

그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있을 때 200개의 전등을 발전소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전깃줄 없이 켜보이기도 했고, 역시 전선 없이 전기를 전달하여 마치 필라멘트처럼 40미터 길이의
두 갈래로 된 불꽃을 탑과 탑 사이에 일어나도록 하여 운동장만한 크기의 지역을 밝히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햇빛은 태양에서부터 9천 4백만 마일 되는 거리를 통과해 지구에 도달하는
진동에 의한 것으로서, 자기가 태양광선을 형성하는 진동과 흡사한 진동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태양광선과 비슷한 광선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더군다나 이 광선은 구름이나 다른 방해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태양광선은 우주의 공간 ‘에테르(ether)에서 1초에 500조 번 진동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진동을 만들기만 하면 되는데, 이미 자기의 기기로 어느 정도까지 진동을 만들었으니
조금 더 개량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바로 동적전자감응전구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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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제어 어뢰


1907년 3월 20일 <뉴욕타임스>에 ‘테슬라의 무선어뢰’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다.
그 내용은 테슬라가 멀리서 전파로 조종할 수 있는 어뢰를 만들어 실험도 끝냈지만,
무선으로 전파를 보내 직접 파괴하는 것이 훨씬 더 위력이 크다면서, 자기가 만든 기구로 전기에너지를
농축시켜 원하는 지점 어디에나 낙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레나(Lena)라는 프랑스 선박이 이상하게 전기불꽃이 튀면서 폭발한 사고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모를 때 <뉴욕타임스> 기자가 테슬라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다.
테슬라는 이어서 어뢰를 원격조종하기도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어뢰를 공중의 비행체나 수중 잠수체로
변형시켜 이곳으로부터 강력한 전파를 발사하여 목표물을 폭발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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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테르 연료 자동차


현재 세계의 화석연료가 고갈되어 가고 있고 피할 수 없는‘연료 대란’을 목전에 둔 현실에서
테슬라가 영원히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대기 중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고성능의 자동차를 버팔로
시내에서 질주했다는 것은 생각 있는 과학도들에게 자극제가 될 것이다.
근래에 와선 건전지를 이용한 전기자동차가 한참 대두되더니 요즘에는 연료전지(fuel cell)를 이용한
전기자동차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그때 캐나다 발라드(Ballard Power System)사가 세계 최초로 연료전지 개발에 착수하여 일본이나
독일 유수 자동차 회사들과 합작으로 기술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요즘 한국의 대기업 중에서도
대체에너지 연구에 뛰어든 곳이 있어 희망을 가져본다.

전기자동차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와서 화석연료 고갈이나 환경문제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다.
1920년대에 이미 전기자동차의 필요성에 관심이 고조되었고, 각 자동차 제작사들이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자동차를 선보이기도 했다.
당시는 내연엔진을 시동할 때 앞에서 크랭크를 돌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미션도
지금처럼 속도를 변환하는 데 매끄럽지 않았으며 여러 가지 잔고장도 많고 정비 또한
간단하지 않았다.

반면에 전기모터를 사용하는 자동차는 조작이 아주 쉽고 변속할 때 덜컹댈 염려가 없어
여자들도 쉽게 운전할 수 있었고, 기계 자체가 매우 간단해 고장 염려도 별로 없기에 백화점
배달트럭이나 의사들 왕진용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전기자동차 출시로 유명했던 회사들은
디트로이트 일렉트릭(Detroit Electric), 콜롬비아(Columbia), 베이커(Baker),
라우시&랭(Lauch&Lang), 우즈(Woods) 같은 회사들이었다.

지금은 모두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때는 포드, GM 같은 회사들도 여러 자동차 회사들
틈에 끼어 생존경쟁을 하고 있었다. 전기자동차는 배터리로 에너지를 공급하기 때문에
무겁고 덩치가 크며 속력이나 운행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이 단점이었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특수 용도로서의 인기는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연엔진의 셀프모터의 등장으로 스위치 하나로 시동이 가능해지자 전기자동차의
인기는 급속히 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기자동차는 직류모터를 사용하는데, 이에 반해 테슬라는 교류모터를 사용했고
차 뒤에는 180센티미터 정독 길이의 안테나를 장착했다.
1931년 피어스-애로사와의 계약하에 진행된 테슬라의 실험중 자동차를 시험운전한 사람은
테슬라와 같은 유고슬라비아 태생으로 오스트리아 공군 조종사 출신이었으며,
테슬라를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피타 사보(Petar Savo)라는 32세의 청년이었다.
1960년대에 와서 사보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버팔로의 어느 작은 차고에 들어가서
자동차 본네트를 열고 가져온 진공관 12개를 장치에 꽂고 무언가를 조금 조종하고 시동을 걸었다.
전기를 일으키는 장치는 길이 60센티미터에 폭 30센티미터, 높이 15센티미터의 상자처럼 생겼으며,
사용한 진공관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후에 3개는 70L7-GT 진공관으로 밝혀졌다.

사보가 운전대에 앉고 테슬라는 보조석에 앉아 지시하는 대로 시동스위치를 켰는데 아무 소음이 없었고,
전진기어를 넣고 가속페달을 밟으니 앞으로 굴러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버팔로 시내를 거쳐 시외에까지 다니면서 시험운전을 했다.
속도계는 120마일(시속 192km)까지 있었으나 90마일(시속 145km)까지 밟았고
그런 고속에서도 자동차는 아주 조용했다. 시험운전을 마친 테슬라는 확신을 얻고
자동차에 대해 설명했다.
그 자동차는 연료가 전혀 필요 없으며, 여기에 사용된 원리는 자동차를 움직일 뿐 아니라
가정에 전기도 공급하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기차, 선박, 비행기에도 사용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모터의 원리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으나 그의 장치는 단순히 에테르에 있는
신비스런 방사선을 받는 장치일 뿐이며, 그 방사선은 공중에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므로
인간은 대기에 그런 에너지가 한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보는 그 후 8일 동안 계속 그 차로 시내와 시외를 운전하고 다녔으나 피어스-애로사의
휘발유 차종 8기통 125마력(bhp), 366in³ (6천cc)짜리 차의 성능과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마지막 시험운전을 끝낸 그들은 자동차를 다시 버팔로에서 20마일 떨어진 교외의 어느
비밀장소에 가져다 놓고, 시동키와 전기장치를 떼어내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테슬라의 비서가 허락도 없이 차에 대한 소문을 퍼트린 덕분에 테슬라는 어떻게 배터리 없는
전기자동차를 만들 수 있으며 전원은 어디에서 얻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 테슬라는 주변에 널려 있는 에테르에서 얻는다고 마지못해 대답을 했다.
그때 테슬라가 미쳤다는 사람도 있었고 악마를 신봉하는 조직과 연루되어 마귀의 힘을 빌려 괴상한
이적 행위를 한다는 말도 있었다.
피어스-애로사와 협상이 잘 되지 않았거나 다른 사정 때문인지 이 전기자동차는 결국 빛을 보지 못했고
이로 인해 테슬라는 다시 뉴욕시로 돌아가면서 그 장치를 분해해서 없애 버렸다.

참고로 에테르에 대해 설명 하겠다.
원래 에테르는 하나의 가설로, 19세기에 빛, 열, 전자파 같은 것을 전달하는 매체이자
우주공간을 채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로 이해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켈슨-몰리(Michelson-Morley)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같은
과학자 덕분에 불필요한 가설이 되었고, 지금은 마치 전기가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가정에 불과하다.
테슬라가 사회의 통념을 따라 ‘에테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 그가 말한 것은 ‘슈만공명’을 의미했다.

그는 지구 표면에서 전리층(고도 약 80킬로미터) 사이를 ‘슈만층’(Schumann cavity)이라 하고,
슈만층에는 7.83헤르츠의 전자기파가 흐르고 있는데 이를 슈만공면 또는 ‘지구 자장의 맥박’이라고 했다.
이 파장은 지구 표면의 슈만층 어느 곳에나 전혀 약화됨이 없이 돌고 있다는 것이다.
테슬라가 자동차에 사용한 무료전기는 바로 이 슈만공명을 잡아 전기에너지로 변환시킨다는 의미였고,
누구나 간단한 변환기만 있으면 지구 어느 곳에서나 쉽게 전기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가 이미 그 기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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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칼라파

테슬라가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의 실험을 통해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스칼라파’라고 하는
‘종파’(縱波, longitudinal wave)에 대한 이론이다.
테슬라가 지구에 이미 존재하는 전기에너지를 지구 어느 곳이든 쉽게 보낼 수 있다고 한 것은
전자파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종파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테슬라가 호언장담한 것으로 보아 이미 완전히 독자적으로 이론뿐만 아니라
실용단계까지 도달한 것 같다.

1960년대에 미 국방성 소속 과학자 리치몬드(Walter Richmond)와 비어든(Thomas Bearden)
중령이 이 ‘스칼라파’를 발견했다. 비어든 중령의 말에 의하면, 1963년 소련이 미국의 원자력잠수함
트레셔(Thresher)호를 격파시킨 것이 이 테슬라의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소위 ‘사이코트로닉 무기’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1999년 봄 이름을 밝히지 않은 미 육군의 한 장성은 아트 벨(Art Bell)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광선속도(초석 30만 킬로미터)의 4.7배나 되는 속도로 통신이
가능한 단계까지 종단파를 개발했다고 발표하면서, 이것은 해저 어느 곳에 있는 잠수함도 찾아
폭파시킬 수 있고, 실내 온도에서 바위를 녹일 수도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물론 이것은 21세기 과학에 해당하는 첨단과학이며, 극비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통상적으로 전파의 속도가 광선의 속도와 같다는 이론을 완전히 뒤엎은 세계가
놀랄 만한 이야기이지만 거의 100년 전에 이미 테슬라가 혼자서 개발하여 실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을 돈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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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조종



1914년 테슬라는 대기 중에 있는 습기에 존재하는 전기를 조작하여 바다에서 무제한의
수분을 끌어오는 것이 가능하며, 전자기파 조작만으로도 산불도 끄고, 짐승이나 곤충, 미생물 등
생물의 멸종이나 파괴를 막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항상 주장하기를 지구의 크기도 조정할 수 있으며, 우주의 행로를 바꾸어
계절을 조절할 수도 있고, 지구를 다른 행성과 충돌시킬 수도 있으며, 유사 태양을 만들어
빛과 열을 생성하여 공급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항상 천재에서 미치광이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테슬라가 이런 원칙을 이용하여 기후를 조종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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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구스카 폭발



시베리아 퉁구스카 사건
사건당시 그지역에는 니콜라 테슬라의 전류방패막 연구소가 있었다,
250만와트=2500Kwh의 전력으로 작동되는 전류방패막에 포탄을 발사해서 방어하는
실험이 있었다고한다,
그때 하늘을 거슬러 올라가는 거대한 불덩어리를 많은 이들이 목격했다고한다,
포탄은 전류방패막과 충돌해서 그때 생겨나는 반발력으로 튕겨져 하늘로 날아간 것이다,
포탄과 전류방패막의 충돌시 전류방패막은 급격한 진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진동은 즉 제동복사효과를 일으켜 막대한 양의 가시광선,자외선,적외선,전자기충격파,
공기의 충격파를 발생했다,
그때 발생된 파괴력은 15메가톤의 핵무기와 맞먹는다,(제주도면적에 파괴를 입히는 위력)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17분 바이칼 호수 북쪽 시베리아 포드카메나야 퉁구스카 강 지역
상공 8킬로미터 지점에서 이상하고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퉁구스카 강 주변은 툰드라가 끝난 남쪽의 광대한 침엽수 원시림 지역이었다.
이 폭발로 바로 밑에 있던 2,150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초속 60킬로미터 강풍에 해당하는 공기파와
섭씨 1,660만도 정도의 열파가 덮쳤으며, 다음 약 8천 평방킬로미터 지역에 8천만 그루 이상 되는
나무들이 불에 탔다.
폭발의 충격파는 런던 지진관측소에까지 감지되었는데, 그 위력은 진도 5의 지진 또는 TNT 10~15
메가톤에 해당하는 것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의 약 2천 배 규모였다.

이 지역은 광활한 무인지대로 알려져 있으나, 그 속에는 원주민들이 간헐적으로 작은 마을을
구성하고 살았으며, 많은 사슴떼도 살고 있었다.
즉, 이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1960년 우바로프(Valery Uvarov) 박사의 조사 때에도
인근에서 약 3천 명의 목격자들이 살아 있었다.
이들에 의하면 북북동쪽 하늘이 밤새 오렌지색을 띤 강력한 노란빛이었고 다음날 아침 동이 틀 때까지
훤했으며, 빛이 번쩍이거나 깜빡거리는 일도 없었고, 무지개나 오로라처럼 빛줄기가 나타나는 경향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The Fire Came By",Spenser Russell.The Royal Meteorological Society Quaterly,1930.)
세계적인 과학자들로 구성된 조사단이 여러 차례 답사하여 땅을 40미터나 파보았는데도 운석이나
분화구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핵폭탄이나 유성이 떨어진 것은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어떤 이들은 블랙홀이나 반물질(antimatter) 같은 설을 주장하지만,
모두 모순이 많아 여전히 과학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한편 이 사고에 대해 테슬라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니켈슨(Oliver Nichelson)이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테슬라가 무선으로 엄청난 양의 전기를
원하는 곳에 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을 누누이 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테슬라는 송전시스템을 무기로 사용하려면, 지구의 전기 상황을 조작, 변형시켜야 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지구에 대전된 전기의 진동을 송전기와 맞추면 나침반도 다르게 작용할 것이고,
대기 상층부는 마치 그의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전구 속에 들어 있는 가스와 같은 성질을 띠기 때문에
지구 전체를 하나의 전기 부속처럼 취급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는 일반 전기송전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송전의 차이는 다만 시간의 차이일 뿐이라고 했다.

워든클리프 타워로 전압 1억 볼트에 전류 1천 암페어까지 실험을 해본 그는, 만약 이런 전량을
아주 짧은 시간에 방출하게 되면 TNT 수백만 톤을 터트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며,
이런 전기 덩어리를 지구 어디든지 원하는 곳에 빛의 속도로 보낸다면
그 지역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릴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The Tesla's High Frequency Oscillator",Winfield H. Secor,The Electrical Examiner,
March, 1916. p. 615.) 테슬라가 퉁그스카 폭발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근거는 1900년부터 약 10년간이 테슬라가 가장 극심한 좌절감으로 고심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모건을 위시한 모든 재벌가들이 재정 지원을 거부했고, 과학계마저도 그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절박한 심정에서 무선송전이라는 그의 발명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인명 피해가 없는 지역을 선택하여 시범을 보였고, 그것이 1908년 퉁구스카 폭발이라는 것이다.
평화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이 투철했던 그가 많은 짐승과 원주민들을 죽이는 일을 했을리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필경 테슬라 자신도 예기치 않았던 훨씬 큰 위력이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테슬라가 원했던 장소에서 빗나간 것일 수도 있다.

목표가 빗나갔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피어리(Robert E. Peary)는 10여 년 동안 계속해서 북극 지역을 측량하고 탐험했는데,
(1902,1906,1909년 북극 정복) 그 탐험팀의 기지가 캐나다의 최북단 엘레스미어 섬의 앨러트였다.
이 앨러트는 지구본에서 워든클리프 타워와 퉁구스카를 북극을 통해 직선으로 연결하면
바로 그 선상에 있었다.
그래서 혹시 테슬라의 원래 의도는 피어리 탐험팀이 가까이에 있는 북극 어느 곳을 목표로 해서
그로 하여금 폭발의 규모를 증언하도록 하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자신의 발명이 위대함을 증명해 보이고 자기주장의 중요성을 대대적으로 펼쳐 여론을 몰아 자본가나
투자자들의 주목을 끌러 보려 했으나, 뜻하지 않은 인명 피해와 자연파괴 때문에
오히려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것이다.
여하튼 테슬라가 퉁구스카 폭발의 장본인이 아니었다면,
그가 주장한 ‘저주파 현상’이나 ‘슈만진동’을 위시한 여러 원리와 학설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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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실험



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은 독일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기 위한 피닉스 작전의 일환으로,
테슬라를 위시해서 폰노이만(John Von Neumann), 허친슨(John Hutchinson),
커텐아워(Emil Kurtenhour), 아인슈타인 같은 당시의 석학들을 소집하여 무지개
작전이라는 실험을 했다.
이 작전은 필라델피아 해군 항만에서 이루어 졌는데 보통 ‘필라델피아 실험’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테슬라가 책임자로 있어 다른 과학자들은 그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과학자들이 고집을 피워 테슬라를 따르지 않게 되자 테슬라는 사임하고,
그의 뒤를 이어 폰노이만이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폰노이만은 헝가리에서 태어난 수학 신동으로, 6살 때 암산으로 8자리 나눗셈을 할 정도였으며,
당대 가장 뛰어난 수학자 중 하나였다.

그는 독일과 스위스에서 연구하다가 1930년에 미국으로 건너와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폰노이만 기계라는 최초의 컴퓨터를 만든 사람으로
‘폰노이만 대수’, ‘오퍼레이터 이론’, 게임이론 등을 개발했고, 독일 물리학자
하이젠버그(Werner Heisenberg)의 ‘불확실성 원리’를 ‘양자물리학의 수학적 기본’이라는
이론으로 증명하기도 했으며,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선상(線上)의 움직임이 아니라고
증명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그가 남긴 업적은 수없이 많다.
1903년대에 들어서면서 니콜라 테슬라는 이미 수명의 다른 과학자들과‘시공간 연속체’라는
다른 차원으로 옮겨 다니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전기를 이용하여 물체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은 시카고 대학에서도 이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한편 이보다 먼저 아인슈타인도 ‘중력과 전기의 통일장 이론’을 발표하고,
이 원리를 이용하여 바다에서 전자기파로 배를 위장하는 방법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1925년~1927년 사이에 독일어로 이 논문을
프러시아 과학저널에 발표했으나 후에 완전하지 못하다고 철회했다.)

폰노이만이 있었던 프린스턴 대학의 진보학문연구소(Institute of Advanced Studies)는 1939년
작은 물체를 보이지 않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연구소는 이를 미 정부에 알렸으며, 군에서는 당시 전쟁에 돌입한 상황을 고려하여
이를 실전에 이용하려고 계획했다. 이것이 ‘무지개 작전’으로 구체화되었고,
결론은 테슬라 코일 4개를 작동시켜 자장을 만들고 그 자장으로 소위 ‘과도공간기포’
(Hyper Space Bubble)를 물체 주변에 조성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 원리는 함선 주변에 아주 강력한 자장을 만들어 감싸면 태양빛 같은 광선이나 레이더등에
사용하는 전파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굴절하게 되어 보이지 않게 되며, 혹시라도 적이
어뢰를 발사하면 그 진로가 굴절되어 옆으로 빗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 실험은 마치 보이지 않는 옷을 몸에 입히는 것처럼 배가 적에게 노출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다.

그때 아인슈타인과 테슬라는 만약 이런 기술이 개발된다면 인류를 위해 사용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다.
드디어 1943년 여름, 뉴욕 해군 항만기지 소속 엘드리지(USS Eldridge DE 173) 경구축함에
75Kwh(1500억V로 승압)발전기 두 대,자장을 만드는 테슬라 코일 4개를 위시한
여러 전기기구를 가득 싣고 필라델피아 해군 항 앞바다에서 실험이 시작됐다.
1943년 7월 22일 오전 9시에 함상의 발전기를 발동시켰고,
곧 선박 주변이 초록색 안개로 가려지면서 선박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얼마 후 안개 자체가 걷히면서 선박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를 주시하던 해군 고위 장교들이나 과학자들은 선박이 레이더망만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볼 수 없다는 것에 대단히 만족해 했다.
얼마 후 발전기를 끄도록 명령하자 다시 초록색 안개가 서서히 나타났다가 그 안개가
가라앉으면서 엘드리지 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육지에 있던 관련자들이 승선해 보니 무언가 매우 잘못되어 있음을 알았다.
갑판에 있던 선원들은 얼이 빠져 있었고, 매스꺼움과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그래서 당국은 선원들을 모두 교체시키고, 앞으로는 레이더에만 감지되지 않게 만드는
방향으로 실험을 변경했다. 10월 28일 오후 5시 15분, 다시 실험이 시작되었다.
발전기를 발동하고 테슬라 코일이 작동하여 전기자장이 일어나자 함선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해
뱃머리만 약간 보일 정도였다.
얼마 동안은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지만 갑자기 선박에서 파란불이 번쩍 일면서 배 전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불과 수초 사이에 함선은 약 400킬로미터 남쪽에 있는 버지니아주 노포크함 앞바다에
수 분 동안 나타났다가 다시 필라델피아 해군기지 앞 바다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모두 181명이 승선했었는데 그중 120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으며,
40명은 죽고 21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나 생존자 중 일부는 미쳐 버렸고 산 사람 모두는
신체적으로도 매우 심한 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일은 그중 다섯 명이
함선의 철판에 박혀 버려 철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애초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게
하려던 실험이 뜻하지 않은 선박과 선원 전체의 텔레포테이션을 맛보는 사고로 끝을 맺은 것이다.
이에 대해 해군 당국은 그런 실험을 한 일이 없으며,‘엘드리지’라는 함선이 없어진 일도
없다고 주장하고, 그 함선의 일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실험으로 당국과 실험 당사자들은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고 호기심 또한 커졌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우월한 무기를 가지려는 욕망이 이를 포기했을 리가 없다.
알려진 바로는 미 해군이 1950년대에 ‘팀머맨(USS Timmerman)이란 함선으로 또다시 실험을 했으며,
이번에는 엘드리지호 때처럼 400헤르츠를 사용하지 않고 1천 헤르츠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 이론을 비행기에도 적용시키려는 노력도 있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라필(Stewart Raffill) 감독이 1984년에 만든 <필라델피아 실험>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1943년에 사라진 엘드리지 호의 두 수병이
오직 전쟁중의 기억과 전혀 늙지 않은 육체로 1980년대에 오게 된다.
이들은 1980년대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적,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하며 이상한 일이 벌어져
비밀연구당국(몬토크)에 알려지자 위험을 느끼고 도망가다가 결국 다른 차원에 있는 함선에 일종의
블랙홀을 통해 되돌아가 아직도 가동되고 있는 발전기를 부수고 다시 지구로 돌아온다.
이 줄거리는 꾸며낸 것이며, 그들은 그냥 4시간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왔다는 설도 있다.

하여튼 ‘필라델피아 실험’ 이라는 해프닝은 테슬라 혼자만의 이론으로 일어났던 일은 아니지만,
그와 관계가 있기도 하고 첨단과학이 어떤 경지에 들어가고 있는지를 알리는 차원에서 소개해 보았다.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cience&uid=1426


Posted by 치즈볼
|
그날 참석하고...얼굴도 사진에 찍히고..ㅋ~
이 무슨....ㅎㅎ 알찬 강연...토론에 대해서 다시한번 느끼게 해준 강연.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와 TV토론에 대한 진실?을 알게해준 강연..ㅎㅎ
노력한 만큼 민주주의든 뭐든 얻어질 수 있다는걸 깨달았던 강연~

얻고 싶으면 노력하라...가만히 앉아서 불평만 하지마라..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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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단절의 세기, 더 많은 소통의 조건과 과제는

희망제작소는 2009년, 매월 우리시대 최고의 공공리더들의 혜안을 듣고 한국 사회의 전망을 함께 모색해보는 <희망을 열어가는 대화마당>을 개최합니다. 6월에는 시사평론가 정관용씨를 초청하여 “단절의 시대, 더 많은 소통의 조건과 과제”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았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상호 소통하며 살아간다. 사회적으로도 소통은 계층과 집단 간의 갈등해소라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사회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은‘단절’이다. ‘여’와‘야’,‘진보’와‘보수’는 물론, 세대, 이해 집단 사이에서 극단적인 의견대립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에 희망제작소는 지난 6월 30일, 희망제작소 4층 희망모울에서 『단절의 시대, 더 많은 소통의 조건과 과제는』이라는 주제로 전 KBS 심야토론 진행자 정관용씨를 초청하여 강연을 열었다.

국내 방송 토론의 현장에서 무려 1,900여 회에 걸쳐 사회를 보아왔다는 정관용씨는‘소통’을 주제로 초대된 명사답게 청중들을 참여시키는 질문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토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쏟아진 청중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명료하게 종합한 그는 많은 사람들이 토론의 정의와 목적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제대로 된 토론이 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 현실의 역설을 먼저 지적했다.


강연 중인 정관용씨
설득당하지 않으려는 과잉이념화된 토론 문화가 문제

이어서 정관용씨는 일반적으로 시사적인 문제와 결부되어 경직되고 차가운 단어로 인식되는 토론을 일상적인 사례로 옮겨서 강연을 풀어갔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는 A와 B, A는 새로 생긴 중국집을 추천하지만 간밤에 술을 마신 B는 설렁탕을 권한다. 메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둘은 서로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를 수용하고 견해의 차이를 좁혀나간다.’ 그는 이렇듯 일상과 달리‘ 왜 공식적인 토론이란 이리도 격렬한 싸움의 장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우리 사회의 소통 부재와 토론의 어려움은 ‘통역사화’와 ‘과잉이념화’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압축적인 경제 성장과 사회의 격변으로 인해 친일파가 현대의 경제성장에 기여한 공신이 되는 등 이중성이 나타났고 당사자들 간의 앙금이 청산되지 않아 현재까지도 모든 주제가 현대사 전체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또 언론이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기능을 잃고 정치 세력과 함께 편애논리, 진영논리에 빠져있음을 말했다.

“토론을 서로의 관점까지, 즉 서로의 내면까지 들어가보는 진정한 대화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일상적인 소통에 사람들은 상대방의 잘못된 생각을 굴복시키겠다는 것이 아닌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합의를 이루기 위한 마음가짐으로 임합니다.”

정관용씨는 토론에서도 일상적인 사례의 이야기처럼 상대방을 공격하려는 자세보다 이해하려는 마음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내가 설득 당하지 않겠다는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는 한 상대방은 절대로 설득 당하지 않습니다.”

강연 중인 정관용씨

소탕이 아닌 소통을 위한 자세가 필요한 시점

그는 청중들에게 방송 토론의 특징이 사회적 토론 문화에 미친 해악을 밝히기도 했다. “방송 토론이란 일반적인 토론과 다른 특별한 목적과 이로 인한 구조적 한계를 가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 모습을 보고 토론이란 나는 옳고 상대방은 틀렸음을 전제로 상호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 하는 거에요.”. 방송 토론은 그 목적이 보여주기 위한 것에 있는 매우 특별한 토론이며, 합의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공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일부 방송 토론 출연자들은 자신이 대표로 나온 소속 집단에서 더욱 강력한 지지를 받기 위해 상대방을 향해 더욱 공격적이 되고, 이런 토론자들을 섭외해 시청률을 높이고자 하는 방송사의 전략 또한 토론 문화를 저해하고 있다고 했다.

“극단에 서서 자기 주장만 하는 사람은 소통이 아니라 소탕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강연의 말미에 자신 역시 이러한 한국 사회의 대화와 토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화속에서 무력감을 느낀다고 토로하였다. 이렇게 대화가 단절된다면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다는 진단이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 것일까.



적대적 공존관계에서 벗어나 세부사안을 위한 토론 시작되어야

그는 “그래도 계속 대화를 시도 해야한다”며 우리 시대에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로, 각 진영들이 적어도 함께 살고 있다는 공존만큼은 인정하고, 둘째로 모든 토론을 제네럴리스트가 아닌 스페셜리스트가 참여하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정책 중심으로 벌일 것, 셋째로, 철저한 절차와 단계를 거치는 토론을 할 것이 그것이다.

이에 덧붙여 그는 우리 사회, 특히 정치와 언론의 영역에서 각 진영이 ‘적대적 공존 관계’에 빠져있다고 규정했다. 각 진영의 진보와 보수들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해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소모적으로 서로를 비난하기 위해 양립한다는 것이다. “내가 뭘 잘할 수 있다가 아니라 상대편만 나쁘다고만 이야기 하는 사이가 적대적 공존 관계”라며 정관용씨는 서로를 헐뜯고 욕하는 정치의 모습에 국민들이 염증을 느끼고 있다며 이제 보수와 진보 진영은 서로 양 극단이 아닌 온건파 중간층이자 정책 소비자인 시민들의 목소리에 다가가야 한다고 밝혔다.

“중간을 향해 겨냥하는 토론이란 하면할 수록 상대방과의 입장 차이가 좁아져요. 중간층을 겨냥해서 경쟁하면 서로 중간을 향해 다가오는 거에요. 그럼으로써 비로써 접점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강연이 끝나자 남은 시간은 청중들의 활발하면서 심도 있는 질문들로 채워졌다. 그는 권력의 집중으로 인해 온건파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장치가 없는 것 같다는 청중의 질문에 동의하면서 한 단계 발전적인 소통 문화를 위해 과도한 정치 권력을 분산 시키려면 문화, 예술, 지식 각계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는 대안적 미디어으로 대두되고 있는 블로그에 대한 입장도 조심스럽게 밝혔다. “더 두고 봐야죠.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보는데. 1인미디어가 더 편향적인 경우도 많아요. 요즘 젊은이들이 우리 세대보다 매우 감정적입니다.” 더욱 격렬히 감정적일수록 인기 블로그로 꼽히는 세태, 과거 팽배하던 권위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진 젊은 세대에 대한 우려가 있지만 크게 개선된 교육여건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는 희망제작소와 같이 세부적인 정책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곳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희망제작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었다. 이번 강연은 우리 시대의 토론과 소통 문화 전반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상호이해를 바탕으로 한 설득이라는 평범하지만 가장 정답에 가까운 대안의 실천 방안을 공유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담당연구원: 희망모울 인턴 김규철 / hopemoul@makehope.org 2009.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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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 아이폰의 국내 출시설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른바 '오바마폰'으로 알려진 블랙베리 스마트폰이 7월부터 개인 판매를 시작한다. 국내 출시된 외산폰들이 잇따라 참패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블랙베리가 외산폰의 자존심을 세울수 있을지 주목된다.
 
24일 업계에 따르면, SK텔레콤(대표 정만원)은 현재 기업용으로 판매하고 있는 림(RIM)사의 블랙베리 볼드(사진)를 이르면 7월 첫째주부터 개인시장에도 출시할 예정이다. SK텔레콤측은 "정확한 날짜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7월초 개인시장 출시를 목표로 막바지 작업 중"이라고 밝혔다.

블랙베리는 미국 오바마대통령이 사용해 더욱 유명해진 스마트폰으로, 북미와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 150여개국에서 약 2000만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다. SK텔레콤은 블랙베리를 지난해 말 기업시장에 출시해 현재까지 2000여대를 판매했다.
 
블랙베리는 단말기 가격이 70만원대 후반으로, 개인 판매가 이뤄질 경우에는 보조금 등을 감안하면 50만대에 구입이 가능할 것으로 관측된다. 또한 음성통화 요금제와 데이터 요금제 외에 블랙베리 전용 이메일 서비스 요금이 월 1만4000원 정도 추가된다.

블랙베리는 컴퓨터 이메일을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는 기능이 특징이어서 이메일 서비스 요금제에 가입하지 않으면 단말기 구매 자체가 불가능하다.
 
블랙베리의 개인판매는 국내 시장에 출시된 외산폰들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가운데 추진되는 것이어서 이목을 끌고 있다.

지난 3월 선보인 대만 HTC의 터치다이아몬드(SKT향)는 5월말 누적 판매량이 겨우 1000여대에 불과하다. 소니에릭슨의 엑스페리아X1(SKT향)도 대대적인 TV 프로모션에도 불구하고 출시 3개월간 1만5000여대가 팔리는 데 그쳤다. KT가 출시한 노키아 6210 내비게이터도 핵심 사양인 지도 기능이 빠지면서 동력을 상실해 출시 2개월간 1만대 판매에 그쳤다.

블랙베리도 누적 판매량이 2000여대에 불과하지만, 이는 기업용이라는 한계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것이 SK텔레콤측의 설명이다. SK텔레콤 관계자는 "블랙베리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사용하면서 브랜드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다"면서 "아이폰처럼 멀티미디어 기능에 특화된 것이 아니라 업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비즈니스맨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블랙베리는 림사가 자체 개발한 이메일 서비스를 이용하기 때문에 보안 사고에 대한 우려가 적다는 것도 강점이다. 터치 기능은 없지만 트랙볼로 원하는 메뉴를 빠르게 선택할 수 있어 편의성도 뛰어나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다만, 대리점 판매 가격이 비싸다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이통사 대리점의 한 관계자는 "SK텔레콤이 밝힌 블랙베리의 단말기 출고가는 70만원대 후반으로, 보조금 등을 감안하면 대리점에서 50만원대에 공급될 전망"이라며 "100만원 가까운 삼성 옴니아가 일부 대리점에서 40만원대에 판매되는 것에 비하면 할인폭이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

또한 멀티미디어메시지서비스(MMS)와 DMB 등 멀티미디어 기능이 취약한 점이 아쉬운 대목으로 꼽히고 있다.

이정일 기자 jay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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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ology 101 1/2: The Unspoken Rules for Success in Academia

 

 

 

예일대 교수 Sternberg의 책..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다 싶었다..

 

교육학의 지능이론에 나오는 그 스턴버그 지능설의 ..주인공.

 

서울대 심리학과 신종호 교수가

"스턴버그가 들려주는 성공하는 학자가 되기 위한 암묵적 지혜"로  서울대 인지학습연구회 사람들과 번역해서 내놓은 책이다.

 

원서는 2003년에 출간되었고..

번역본은 2009년 1월에 출간되었다.

 

101가지의 지혜가 담겨있는데...

인생을 살아가면서...그리고 학자가 되기위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궁금증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언론에 소개 되기를 신임교수들이 읽어야하는 책이라고 나와있는데...

 

이런 기본적인 사항도 모르고 교수가 되었다면....

별로 자격이 없을듯 싶다.

 

이건 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학부생들이 기본적으로 읽어두면 좋을 책같기 때문이다.

 

평소....물음표를 떠올렸던 것들에 대답이 이 책이 있었다.

 

우연히...발견했는데....

오늘 몇시간만에 다 읽어버릴 정도로...

집중할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사회과학총류  새로 들어온 책중...> 북촌길 19 에서...

 

책은 잡독(雜讀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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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적률 vs 건폐율

용적률이란 대지 면적에서 건물 각층의 면적을 합한 연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연면적은 지하 면적을 제외한 지상 면적의 합계다. 이에 반해 건폐율은 대지 면적에 대한 건축 면적의 비율을 뜻하는 것이다. 용적률을 제한하는 것은 도시 미관을 유지하고 토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고, 건폐율을 정한 목적은 지면상에 최소한의 빈 땅을 확보해 쾌적한 주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용적률은 건축물이 높아질수록 늘어나지만, 건폐율은 변하지 않는다. 건물의 1층 바닥을 건평이라고 한다.

공시지가 vs 기준시가


공시지가는 국토해양부 장관이 매년 1월 1일 기준으로 발표하는 전국의 땅값을 말한다. 이러한 공시지가는 주로 국세, 즉 양도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의 과세 기준이 되고, 각종 공사 등을 하는데 보상 기준이 되기도 한다. 기준시가는 양도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 각종 세금을 부과할 때 적용되는 전용 면적 165.5 평방이하(50평) 이상의 아파트나 대형 연립주택의 거래 가격을 말한다. 통상 시세의 70~80%로 고시되며 매년 4월 30일 공시된다.

보존등기 vs 본등기vs 소유권이전등기 vs 말소등기

보존등기는 물권 취득자가 자기의 권리를 보존하기 위해 하는 등기로 보통 미등기 부동산의 소유권등기를 말한다. 본등기는 등기로서 완전한 효력을 가지는 보통의 등기를 말한다. 소유권 이전등기는 양도, 상속, 증여, 기타 원인에 의해 유상 혹은 무상으로 부동산의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을 부동산 등기부상에 기입하는 등기를 말한다. 말소등기는 기존 등기의 전부를 말소하는 등기를 말한다.

담보권 vs 저당권 vs 지상권

담보권은 어떤 물건을 채권의 담보로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권리다. 보통은 담보물권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양도 담보까지도 포함된다. 저당권은 채무가 이행되지 않을 때 목적물을 경매해 그 대금에서 저당채권자가 다른 채권자보다 우선 변제를 목적으로 하는 담보물권으로 경매권과 우선변제권이 있다. 지상권은 타인의 토지에 건물, 기타의 공작물이나 수목을 소유하기 위해 그 토지를 사용할 수 있는 용익물권을 말한다.

가압류 vs 가처분

가압류는 금전채권 혹은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는 청구권에 대해 실시할 강제집행이 불가능할 경우, 미리 채무자의 재산을 압류 확보함으로써 강제집행을 보전하는 절차를 말한다. 가처분 신청은 긴급을 요하는 사건에 대해 빠른 시간 안에 법원의 결정을 구하는 제도다. 대개 정식 재판과 달리 심문 없이 서류만으로도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재건축 vs 재개발 vs 뉴타운

재건축은 정비기반시설이 양호한 가운데,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시행하는 것이다. 그 지역의 정비기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노후 주택만 헐고 그 자리에 주택만 다시 건축하는 것이다. 재개발은 정비기반시설 자체가 열악한 상태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노후주택을 헐고 아파트만 짓는 게 아니라, 학교, 도로 등의 기반시설까지 함께 개발하는 것이다. 뉴타운은 규모가 작은 재개발구역의 특성상 정비기반시설이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개의 재개발구역을 묶어 개발하는 것을 말한다. 면적이 큰 만큼 계획적인 재개발이 가능하다.

DTI(총부채상환비율) vs LTV(주택담보대출비율)


총부채상환비율이란 금융부채 상환액이 개인의 연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연소득이 1천만원이고, 금융부채 상환액이 4백만원이면 총부채상환비율은 40%가 된다. 주택담보대출비율은 주택가격 대비 대출비율을 말한다. 즉, 은행들이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해줄 때 적용하는 담보가치 대비 최대 대출 가능 한도를 의미한다.

사이드 카(Side Car) vs 서킷 브레이커(Circuit Breakers)

사이드 카란 선물가격이 전일 종가 4% 이상 등락한 시세가 1분간 지속될 경우, 주식시장의 프로그램 매매호가가 5분간 효력이 정지되는 제도다. 이는 주가가 급격하게 오르거나 떨어질 때 일시적으로 프로그램 매매를 중단시킴으로써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운용된다. 서킷 브레이커란 일종의 공습경보라고 할 수 있다. 선물 서킷 브레이커는 선물가격이 전일 종가 5% 이상 변동 상태가 1분간 계속되는 경우로, 5분간 선물거래의 매매체결을 중단한 뒤 10분간 호가를 접수해 단일가격으로 체결된다.

특히 현물 주식시장에 서킷 브레이커가 발생하는 경우는 코스피가 전일 종가지수 대비 10% 급등하거나 폭락해 1분 이상 지속될 때 발동한다. 이 경우 20분간 현물, 선물, 옵션의 주문이 중단되고 이후 10분간 동시호가를 접수해 매매를 재개한다. 서킷 브레이커는 투자자에게 냉정을 찾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주자는 취지다.

선물(Futures Trading) vs 옵션(Option)

선물이란 선매매하고 후물건 인수도 하는 거래 방식을 말한다. 장래의 일정 시점에 수량, 규격, 품질 등의 표준화되어 있는 특정 대상물을 계약 체결시에 정한 가격으로 인도, 인수할 것을 약속하는 계약으로 거래소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다. 거래소 이외에 개인 간의 직거래를 하는 것이 선도거래(Forward Trading)다. 옵션이란 정해놓은 기간 내에 지정된 상품을 약속된 가격으로 매매하는 권리를 거래하는 것을 말한다. 스톡옵션, 콜옵션, 풋옵션 등이 있다.

뮤추얼 펀드(Mutual Fund) vs 사모 펀드(Private Equity Fund) vs 헤지 펀드(Hedge Fund)

뮤추얼 펀드란 일반 투자자들이 돈을 모아 하나의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고 펀드매니저를 선정, 투자를 맡기는 것으로 철저하게 운용실적대로 배당이 이루어지며 투자손익에 대한 책임도 투자자들이 진다. 투자 대상은 주식과 채권, 기업어음 등 유가증권이 주를 이룬다. 사모 펀드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사모방식으로 자금을 모아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하는 펀드다. 공모펀드와는 달리 운용대상에 제한이 없는 만큼 자유로운 운용이 가능하다. 이에 이익이 발생할 만한 어떠한 투자 대상에도 투자할 수 있다. 헤지 펀드란 개인이나 기관 투자자들로부터 모은 돈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일종의 투자신탁 형태를 말한다. 헤지 펀드는 수익이 나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외환, 주식, 채권, 상품을 가리지 않고 공격적인 형태의 투매를 한다.

전환사채(Convertible Bond) vs 신주인수권부사채(Bond with Warrant)

전환사채란 사채로 발행됐지만 일정 기간 경과 후 소유자의 청구에 의해 주식(보통주)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이다. 평소에는 채권이자를 받다가 결정적인 시점에 주식으로 전환해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일석이조의 투자 상품이다. 신주인수권부사채란 사채권자에게 사채 발행 이후에 기채회사가 신주를 발행하는 경우 미리 약정된 가격에 따라 일정한 수의 신주 인수를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 사채다. 따라서 사채권자는 보통 사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이자를 받으면서 만기에 사채금액을 상환받을 수 있다. 동시에 자신에게 부여된 신주인수권을 가지고 주식시가가 발행가액보다 높은 경우 회사 측에 신주의 발행을 청구할 수 있다.

랩어카운트(Wrap Account) vs 펀드랩(Fund Wrap)

랩어카운트란 증권사가 일정한 비율의 수수료를 받고 고객에게 가장 적합한 투자전략, 유가증권 포트폴리오 구축에 대한 상담 서비스와 부수적인 업무를 일괄 처리하는 금융상품이다. 즉, 증권회사에서 고객이 예탁한 재산에 대해 자산 구성에서부터 운용 및 투자 자문까지 통합적으로 관리해주는 종합금융서비스라고 할 수 있으며, 선진국에서는 투자은행의 보편적인 영업 형태다. 펀드랩이란 여러 펀드를 하나의 묶음으로 엮어 운용하는 펀드 간접투자상품이다. 운용사가 고객을 대신해 펀드의 선택, 투자 비율 및 투자시기 등을 고려해 투자하기 때문에 자산을 효율적으로 배분, 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


이머징 마켓은 보통 개발도상국 가운데 상대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높고,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국가의 증시를 일컫는다. 이에 포함되는 국가로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러시아, 동유럽 국가, 브라질, 중국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증시의 특징은 성장성은 높게 평가되나 그만큼 손실 위험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출처 : 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economic/economy_others/view.html?photoid=3177&newsid=20090107103630821&cp=ladykh
레이디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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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지훈(趙芝薰) 선생은 당대의 술꾼이며 酒仙이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酒道의 단계는 아래와 같다.
 
9급 : 불주(不酒) - 술을 아주 못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8급 : 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하나 겁내는 사람.

7급 : 민주(憫酒) - 술을 마실줄 알고 겁내지도 않지만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6급 : 은주(隱酒) - 술을 마실줄 알고 겁내지도 않고 또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 혼자 숨어서 마시는 사람.
 5급 : 상주(商酒) - 술을 마실줄 알고 또 좋아도 하지만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때만 술값을 내는 사람.
 4급 : 색주(色酒) - 성 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3급 : 수주(睡酒) - 잠이 안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2급 : 반주(飯酒) - 밥 맛을 돋우기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1급 : 학주(學酒) - "주졸(酒卒)" 술의 진경을 배우는 사람. 
1단 : 애주(愛酒) - "주도(酒道)"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2단 : 기주(嗜酒) - "주객(酒客)" 술의 미에 반한 사람.
3단 : 탐주(耽酒) - "주호(酒豪)"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4단 : 폭주(暴酒) - "주광(酒狂)"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5단 : 장주(長酒) - "주선(酒仙)" 주도 삼매에 이른 사람.
6단 : 석주(惜酒) - "주현(酒賢)"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7단 : 낙주(樂酒) - "주성(酒聖)" 마셔도 그만, 안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8단 : 관주(關酒) - "주종(酒宗)"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
9단 : 폐주(廢酒) - 술로 인하여 다른 술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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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선택 10계명’을 신봉하는 사람들

-교수직을 버리고 꿈을 선택한 sds 1기 이경희 선생님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6.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을 바랄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거창고등학교 강당에 걸려 있는 이른바 ‘직업선택 10계명’이다. 서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진학.취업하기 위하여 온갖 힘을 다하는 풍토에서 이런 엉뚱한 가르침을 주는 고등학교가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엉뚱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학생들의 90%가 4년제 대학을 진학한다는 사실이다. 지리산 아래 산골 고등학교, 입시 경쟁보다는 인간이 먼저 되게 하는 전인교육을 시키는 학교, 누구도 현실적으로 여기지 않는 ‘직업선택 10계명’을 가르치는 이 이상한 학교에 들어가려고 전국의 부모들이 경쟁하고 있다.

세상에는 참 엉뚱하고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엉뚱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마침내 그 사회의 존경받는 리더가 된다. 모두가 똑똑하고 자기 것만 챙기는 그런 이기적인 사회에서 자기 것 보다는 남과 이웃의 것을 먼저 챙기고, 희생과 봉사를 즐겨하는 그런 엉뚱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이다.

최근 희망제작소가 진행하는 소셜디자이너스쿨(SDS) 1기를 수료한 분 가운데 이경희 중앙대 교수가 있다. 주거복지학과에서 평생을 바쳐 학생들을 가르친 그이는 SDS과정을 마친 다음 아직도 몇 년이 남은 교수직을 훌훌 던져 버리고 남은 삶을 자신이 가장 꿈꾸어 오던 것을 실천하는데 바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교수가 되기 위해 온갖 서류를 준비하고 지난한 경쟁과 면접의 과정을 거쳤는데 그것을 그만 두는 데는 종이 한 장에 사인 한번 하는 것밖에 없더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이었다. 이제 그이가 버린 것은 그 핏빛 경쟁의 세상이요, 얻은 것은 아무도 가지 않는, 바로 봉사와 헌신의 블루오션이다.

박원순 님의 칼럼(출처: 희망제작소 홈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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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아 니키틴(Synthia Nikitin)은/
뉴욕대 도시계획 및 예술 경영학 석사. PPS 부회장.도시계획과 도심 디자인에 대한 '장소만들기' 이론으로 명성을 얻었다. NYU에서 예술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1991년 PPS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예술계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예술가들과 공공장소를 연계해주는 중개자 역할을 했다. 이후 PPS에 입사해서 지난 15년 동안 150개 이상의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40차례 이상 워크숍을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먼저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게 돼서 정말로 반갑습니다.
특히 희망제작소와 국회, 정부가 함께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갑습니다. 이런 자리에 참가할 수 있게 초대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는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어떤 툴, 어떤 프로세스, 어떤 방법론, 어떤 사례연구가 있는지 또는 어떤 모델이 있는지 그래서 장소를 만드는데 있어 디자인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프리젠테이션에서 툴과 비전을 같이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툴이 없이 비전만 있다면 실현될 수 없고 비전이 없는 툴이나 기술은 쓸모가 없으니까요.


pps-장소만들기의 역사


먼저 PPS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이미 75명이 PPS의 이메일 뉴스레터를 받아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35년이 되었고, 다양한 커뮤니티들과 함께 공공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공공시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공공시장을 활성화하는 것은 농업분야를 지속가능하도록 보호하고 건강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그래서 재래시장과 공동으로 공공건물이라든지 공공장소에서 또는 연방정부 건물 앞에서 파머스 마켓을 합니다. 사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이 국회 건물에서 장을 여는 것도 굉장히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또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디자인과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하고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합니다. 광범위한 연구, 디자인, 홍보활동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뉴스레터 발송과 웹사이트를 운영하고 있고 물론 출장도 많이 다닙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네트워킹을 하고 있습니다.

일년에 트레이닝을 받는 사람이 1천 명 정도 됩니다. 지역사회에서 지역 정치가들과 또 주민들과 함께 장소를 만들어가고(placemaking) 있습니다. 또 건축가들 엔지니어들 도시계획가들 이런 사람들도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사실 장소를 만드는 데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거든요.


장소만들기(placemaking)란?


장소만들기(Placemaking)는 무엇일까요? PPS 안에서도 우리 일 자체에 대한 정의가 무려 7백여 개가 넘을 정도로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Placemaking은 어떤 장소를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시 오고 싶은 곳,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변화하고 진화해 가는 공간인 것이죠. 이 개념은 현재 대부분의 도시가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텍사스와 파리의 거리 풍경의 대조.


왼쪽은 텍사스 휴스턴이고, 오른쪽은 파리입니다. 휴스턴에 경우를 보면 넓은 벽과 도로가 있지만, 보행자를 위한 길은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도시를 디자인할 때 자동차를 위한 것인가 사람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것이라면 디자인은 조금 더 섬세하고 파리의 경우처럼 좀 복잡해야 됩니다. 자동차가 완전히 점령하지 않도록 해서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닐 수 있고 야외 카페도 만들어서 굉장히 활력있고 다양성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이런 것을 디자인하고 관리하고 또 잘 돌아가게 하는 데는 많은 고민과 정성이 필요합니다.

뉴욕과 토론토에서 일한 도시 개혁가였던 제인 제이콥스는 도시 디자인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사람들끼리 부딪히도록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이런 길을 별로 만들지 않기 때문에 지나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이발소 앞에서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50년대에나 익숙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길에서 사람들끼리 이야기하기 보다는 차소리가 더 많이 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를 어떻게 사용하나?


PPS의 창립자이고 도시개혁가이고 또 사회과학자였던 윌리엄 화이트는 '사람들이 도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공간을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플라자라든지 광장이라든지 거창한 개막식과 함께 개장을 했는데 아무도 찾지 않는 스페이스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의도와는 달리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스페이스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만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보스턴과 체코 관공서 앞 공공공간의 대조


왼쪽은 정부건물이 많은 보스턴이고 오른쪽은 체코의 관공서 앞입니다. 같은 관공서가 있는 건물임에도 사람들의 이용방식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건물의 용도가 어떻게 바깥까지 이어지도록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광장을 성공적으로 사용하려면 국회도 마찬가지지만, 주위 건물의 용도와 광장의 연결성이 있어야 합니다. 디자인을 제대로 한다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창이나 출입구를 앞의 여러 가지 이면과 연결해서 디자인한다면 가능합니다. 다만 이것이 디자이너 혼자 힘만으로 이루어지기는 힘듭니다.


디자인이 잘 된 공원과 이용이 잘 되고 있는 공원


왼쪽에 있는 공원은 파리, 오른쪽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라고나비치공원입니다. 왼쪽을 자세히 보면 ' 이 곳에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있습니다. 이런 공원은 디자인적 요소는 뛰어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가거나 노인들이 갔을 때 화장실 가고 물 한 번 마시고 나면 금방 할 일이 없어지는 곳입니다.

우리는 라고나비치처럼 공원에서 사람들이 오래 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와서 잠깐 들리는 곳이 아니라 와서 오래 있고 계속해서 오길 원하는 것이죠. 이 공원을 보면 세발자전거를 타고 다니기가 아주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작은 요인 때문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디자인이 훌륭한 곳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말에만 이용되는 교회의 주차장과 언제나 붐비는 교회 주변


좋은 장소(place)를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훌륭한 장소(place)는 어떤 것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좋은 장소는 무엇보다 먼저 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에서는 항상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고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아주 흥미로운 것이 있어야 됩니다.

또한 좋은 장소는 편안해야 합니다. 좋은 이미지,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리, 그늘도 있고 사람들을 환영하는 그런 요소가 있어야 되죠. 훌륭한 장소는 다른 장소와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차를 타지 않아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차를 타고 가다가도 중간에 내려서 걸어가고 싶은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공간의 사회성이 형성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자원봉사를 해서 청소도 하고 꽃도 심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공공의 지원으로 이 장소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고속도로든 다리든 아쿠아리움이든 먼저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나 외부의 요구에 의해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문화센터가 필요하다, 길을 넓혀야 된다, 용량을 키워야 된다고 생각하고 이 문제에서 시작해서 문제를 해결 혹은 해소하는 데만 초점을 맞춥니다. 사실 대중은 이것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시민들의 참여는 나중이 되고, 주로 정치인들이라든지 공무원들에 의해 시작하게 됩니다.
이런 프로세스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프로젝트를 끝내야 한다는 목표만 있을 뿐이지 장소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이죠.


열개의 힘 power of 10


플레이스 모델을 도시로 확장해서 보면 10의 힘이라는 게 있습니다. 서울이라는 도시에 적어도 열 군데는 반드시 가야 되는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국회를 예로 들어 보면, 국회에서 10개의 장소를 생각해보고 또 10개의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장소와 할 수 있는 일들을 자꾸 확장해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국회라는 장소에서 할 수 있는 백 가지, 천 가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꽃을 바라본다든지 커피를 마신다든지 이런 것을 모아가는 것입니다. 잘 되는 것을 가지고 계속해서 더해가는 거죠.

그래서 더 많은 장소를 만들고 더 많은 지역을 만들고 더 많은 행사를 기획해서 이곳을 하나의 목적지로 만듭니다. 또 아주 편안한 이미지로 만들어서 이 많은 고리들을 같이 연결해 나가면서 하나의 도시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느 한 방향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동시에 아래에서 위로 구축해 가는 것이죠. 퍼블릭 스페이스를 잘 프로그래밍하면 이런 방법이 가능해집니다.


사용자가 전문가


첫 번째 사용자가 전문가입니다. 이 지역에서 장소를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게 잘되고 어떤 게 잘 안 되는지를 가장 잘 압니다. 이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한테 물어봐야 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파트너십 또는 협력 같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한가를 파악하는 데도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디자인이 아니라 장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물론 장소를 만드는데 디자인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까 플레이스 다이어그램이 있었잖아요. 그 활동이나 사용, 사회성 이런 것들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장소를 만드는 것은 지속되는 것이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처럼 장소도 계속해서 바뀝니다. 만약에 어떤 장소가 그냥 고정되어 있고 유연성이 없어서 미래에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없다면 '장소만들기'는 실패하게 됩니다.

코네티컷 뉴헤이븐시의 사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가로 개선 전의 모습과 개선 후의 모습


양쪽 사진은 같은 거리입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시작됐을까요?
예일대학 근처에 있는 이 거리는 굉장히 낙후되고 보기 싫은 지역이었습니다. 먼저 두 개의 주차공간을 없앴습니다. 이 과정에서 시 당국과 광장히 많이 싸웠습니다. 우리는 쇼핑은 자동차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주차공간을 이만큼 할애하는 것은 별로 현명하지 못하다고 설득했습니다. 주차공간을 없애자 인도가 넓어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로수도 심었습니다. 상점 주인들은 미관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 많은 지원도 받았습니다. 아주 작지만 특색있는 아웃도어 카페들이 생기면서 뉴헤이븐 코네티컷은 변화했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플레이스가 된 것입니다.

물론 디자인도 그 일부였지만 그 외에도 공공과 민간부문, 정부와 비정부기관 또는 아침에 커피를 마시기 위해 온 사람들까지 모두가 함께 참여해서 변화를 이룬 것입니다. 정책이라든지, 사회라든지, 경제라든지 이런 모든 부분에서 같이 일을 한 것이죠.


파트너십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작업에서 파트너십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혼자해서는 안 되고 혼자 할 수도 없는 것이죠. 그리고 물론 건축가들도 굉장히 훌륭한 일을 하고 있지만 건축가가 아무리 디자인을 잘 해도 플레이스가 저절로 만들어질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해야 가능한 것이죠. 여러분들은 일을 진행하면서 보통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있는 파트너 말고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하고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마이애미에서 연방법원하고 일했을 때, 우리는 법원 건물 주변에 나무를 심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법원 공무원들이 플로리다는 날씨가 더워서 나무가 빨리 자라니까 약 45마일 떨어진 훼어차일드 트로피칼 가든이라는 곳에 미리 나무를 심어 놓겠다고 했습니다. 법원 건물이 완성되면 바로 옮겨 심을 수 있도록 해서 조경문제가 바로 해결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 곳 사람들과, 또 여러 사람들과 얘기를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더 많은 파트너들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버스 정류장 개선 전과 버스 정류장 개선 후



이 사진은 LA 노스 헐리우드입니다. 보통의 버스 정류장들처럼 처음에는 낡은 정류장 표시가 있고, 쓰레기가 흘러 넘치는 쓰레기 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버스 정류장 때문에 버스에 대한 이미지도 나빠졌고, 깨끗하지 않다는 느낌은 곧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을 불러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협력해서 새로운 버스 정류장 사인을 만들면서 짧은 시간에 놀랍게 변화시켰습니다.
재개발 당국은 버스 정류장을 예술가 그룹에게 1달러에 임대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이 곳에 문화행사를 알리는 게시판을 만들었습니다. 차츰 주위의 여러 매장들도 외관을 예쁘게 가꾸고 아웃도어 카페도 만들었습니다. 정류장이 잘 관리되고 있다는 이미지를 가지면서 사람들은 재미있으면서도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작은 변화지만 이만큼 파급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노스 헐리웃의 변화된 모습


이 레스토랑도 민간 프로젝트입니다. 레스토랑 앞에 있는 플라자를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이것을 임대했습니다. 카푸치노 키오스크가 있어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잠깐 가서 커피를 사올 수 있습니다. 파티오를 설치해서 사람들이 그늘에서 버스를 기다릴 수 있게 했습니다. 굉장히 쾌적한 버스 정류장이 된 것이죠. 오스카상을 주관하는 단체도 이 곳으로 들어왔습니다.

단지 버스 정류장이 바뀌었다는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니겠지만 경제적이라든지 다양한 부분에서 파급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버스 정류장 하나를 바꿨을 때 이 정도가 된다면 서울시에 모든 버스 정류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꼭 스케일이 큰 프로젝트뿐 아니라 사이사이에 있는 작은 작업으로도 아주 훌륭한 플레이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휴스턴 중앙광장과 광장을 위한 열 개의 장소


텍사스에서 있는 휴스턴입니다.우리는 이 곳에 새로운 센트럴 스퀘어를 만들었습니다. 휴스턴 중심에 새로운 광장을 만드는 것인데 원래는 왼쪽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20에이커인데 주차장하고 길로 쓰고 있었죠. 우리는 주민들, 공무원들과 1년 동안 함께 비전을 개발했습니다. 스페이스 프로그램을 개발한 것입니다.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왜 사람들이 여기에 가고 싶어 하는가를 생각했죠. 용도를 생각하고 나서 그 다음에 디자인을 했습니다. 10개의 컨세스트로 비어가든, 놀이터, 아이들의 공연장, 식당 이런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지역에 새로운 집을 지을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지역을 만들기도 했구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주위에 여러가지 공간이 서로 연결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컨벤션, 호텔도 공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그리고 공원 전체 컨셉을 정해서 부분마다 용도와 개성을 달리 했습니다. 여러분의 집에도 각각의 방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용도가 다르게 만든 것이죠. 각 부분마다 어떤 활동을 할 것인지 그려 본 것입니다.

처음에는 함께 일한 조경회사에서 모든 것을 다 너무 현실적으로 만들어서 주민들이나 시에서 탐탁치 않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 플레이스 메이킹을 할 때 건축가라든지 전문가와 함께 일을 할 때는 우리가 가진 비전하고 그 사람들이 제시하는 것이 같은가, 그 사람들이 우리의 비전을 이해하고 있는가를 꼭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딱딱한 것을 조금 바꿔서 4월13일에 개장을 했는데 3일 동안 10만 명이 공원에 왔다고 합니다. 4월 12일에는 한산했다가 4월 13일에 10만 명이 공원에 온 것입니다. 공원 매니저가 우리에게 전화를 해서 '전날에는 없던 사람들이 어디서 이렇게 모였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이 공원에 오고 싶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죠. 강아지 DOG RUNS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고 놀이터, 분수대 , 음식을 먹는 곳, 영화관 등 많은 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이 프로젝트 때문에 또 많은 인근 주택들도 재개발되었습니다.

희망제작소에서 사용하는 말을 빌려오면 사무실이나 책상 앞에서 보다는 현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디자인을 하기 전에 장소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현장에서 많이 관찰을 합니다. 그리고 평가를 합니다. 현장에 가서 그 장소가 얼마나 편한지 액세스, 이미지, 활동, 사회성 등은 어떤지 이런 것을 전부 다 평가합니다. 이 장소를 주요하게 사용할 집단 예를 들면 청소년, 노인,아이들 입장에서 요구가 무엇인지 장기적으로 단기적으로 봤을 때 어떤 게 필요한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찰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워싱턴 스퀘어파크에서도 많은 작업을 했습니다. 사람들의 behavior를 본 것이죠. 사람들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 관찰하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관찰한 결과 각 부분마다 조금씩 용도가 달랐습니다. 어떤 때는 강아지 산책을 시키는 사람들이 많았고, 아이들이 나와서 점심을 먹느라 북적거리는 시간도 있고 저녁에는 사람들이 무리로 모이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관찰하다보면 사람들이 공원을 아침 저녁으로 어떻게 나눠서 사용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입구가 어디인지 알 수 있죠. 여기에는 인포메이션 키오스크 같은것을 두어야 되겠죠. 가장 사람이 많이 들어오는 입구니까요.






(左上)도로 16차선 (右上) 공원을 위한 스케치(左下)공원 조성 이후(右下)겨울의 스케이트 링크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 있었던 프로젝트인데 굉장히 중요한 사례입니다. 디트로이트가 생긴지 300주년이 되는 해에 16차선의 도로를 공원으로 만든 것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디트로이트는 사람들이 계속 떠나서 인구가 감소되고 있는 도시였기에 무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비전을 세우고, 개장을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텐트, 물 등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게 많습니다. 여름에는 이렇게 사용하다가 겨울에는 스케이트 링크를 만드는 등 광장이 크기는 하지만 매우 유연성 있게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디트로이트처럼 다양한 인종이 사는 지역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이 곳은 퍼블릭 스페이스일 뿐만 아니라 사회를 구축해 갈 수 있는 그런 의미있는 장소가 된 것이죠.

워터 스프레이 플레이스
디자인을 잘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디자인은 미학적일 뿐만 아니라 기능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실험적이어야 합니다. 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작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조금씩 더해 나가야 합니다.

파리에서는 8월이면 세느강변에 차량 통행을 막고 해변처럼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와서 선탠도 하고 스프레이 파운틴도 , 클라이밍 월도 있고 댄스강습회도 열립니다.





파리 플라쥬의 벤치

모두 지역 내에서 후원을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시에서 주최를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강변 산택을 즐기지 않던 사람들도 강변에 올 수 있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벤치는 정말로 좋은 벤치입니다. 벤치를 보면 네 그룹의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각자 자기 일에 몰입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죠.





산호세 게레로의 거리와 도로


Placemaking 프로젝트 단계별 가이드

[커뮤니티 생활을 지원하는 도로 만들기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는 지역사회 그룹과 함께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진행한 사례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먼저 사이트를 선정해야 되겠죠. Placemaking 프로세스를 시작할 때 이 사이트가 어딘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주도로, 공원, 시장 어디서든지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6차선 도로를 사이트로 정했습니다. 이 도로는 고속도로에 근접해 있는 길입니다.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들이 사는 저렴한 집들이 있는 거리였습니다. 이 도로가 너무 간선도로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해서 연방정부에서 시와 같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요 이해관계자를 규명하라.
먼저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봐야 되겠죠?
교통국이라든지 아니면 기획국, 주차교통부, 공공시설부 수도국이 공공부분에서는 이해관계자였고, 시민들 중에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죠. 노인들, 보행자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정원사들, 지역주민들, 학교 주변의 기업들 이런 사람들이 지역의 이해당사자였습니다.


주요 이해관계자를 인터뷰하라
이런 사람들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것을 개선하면 좋겠는지. 그리고 워크숍을 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이트 옆에서 워크숍을 진행합니다. 그러면 바로 옆에서 보면서 지적하고 토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스팟을 찾아갔습니다.

워크숍과 탐방 장면


도로는 1.5마일 정도 됐는데 구역마다 굉장히 특성이 달랐습니다. 주거지역이 있고, 상업지역이 있고 그리고 환승지역이 있었습니다. 구역별 특성을 파악한 다음에는 주민들의 요구를 들으면서 단계적인 계획 세우기에 들어갔습니다.

주민들은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을 만들고 싶어했고 그렇다면 차의 속도를 줄이도록 해야 한다고 얘기하게 된 것입니다. 자동차 속도를 줄이려면 보행자가 우선인 도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도로는 어느 도시든지 가장 공공성이 강한 장소입니다. 우리는 도로의 불필요한 부분을 다시 하나의 place로 만들어서 대중들에게 돌려줄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차로를 다시 디자인해서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물어 봤습니다. 이 공원에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있으면 좋겠는가? 아이들과 앉아서 놀 수 있고, 지역 사회에서 작은 페스티벌이나 파티 등 행사를 열 수 있는 정원이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비전을 만들어라.
이러한 의견들을 토대로 비전 맵핑을 했습니다. 아이디어를 가지고 와서 표시를 하는 거죠. 말로 할 수도 있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는데 여러 아이디어를 다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도로를 포장하거나 나무를 심어서 야외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교차로에 조금 더 획기적인 변화를 주자고 제안했습니다.

인도를 넓히고 차가 다니는 길을 줄였고 계속해서 아직도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입니다. 주차공간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구요. 시 당국에 차선 하나를 자전거 전용선으로 만들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웹사이트가 만들어졌고 계속해서 업데이트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디자인 풍경


이런 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아주 작은 변화이지만 시 전체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장소만들기placemaking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모든 것을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애정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우리 시대에서 희망을 찾는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생각하는 시장경제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 그런 시도를 우리 작업 속에서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모든 도시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이 이제는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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