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대면 ‘전 대한민국 국민들이’ 아는 한 아침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
매일같이 1부 방송 30분이 지나면 진행자 손석희 교수는 청취자들에게 친숙한‘소환 주문’을 왼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와 함께 하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곧 이어지는 바리톤의 음성.
“네, 안녕하세요…. 법학교육위가 로스쿨을 수도권에 15개, 나머지 지역에 10개 인가하기로 잠정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서울 지역은…”
예리한 언변으로 정평이 난 진행자도 그의 정확한‘뉴스브리핑’에는 한결 의뭉스럽게 추임새를 넣어준다.
가끔 생각지 못한 사이에 터지는 두 사람의 애드리브는 듣는 이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시사평론가 김중배는 아무리 복잡하게 그려진 2차원의 현안도 간명한 3차원 입체뉴스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그와 함께 했다.
“뚱뚱한 반백의 50대. 보통 제 목소리를 들으면 그렇게들 상상하더라고요.”
정동극장 맞은편의 한 카페. 앞에 앉은 남자가 털털하게 웃고 있다. 키가 훤칠하다.
얼굴은 한창 때의 안소니 퀸처럼 다부진데 안경을 썼다. 눈의 초점이 약간 흐리다. 눈이 좋지 않다고 했다.
말 많이 하는 직업 탓인지 물을 자주 들이켰다.
“그런데 내가 아이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네….”
시골소년의 영어 징크스
김종배.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84학번.
이제 갓
불혹(不惑)에 접어든 그는 초등학생 사내아이의 아버지이자 활자중독자다.
처세술 책 빼고 대부분의 인문, 사회과학 서적은 닥치는 대로 읽는다.
신문도 마찬가지인데 방송국과 아파트에 널려 있는 통에 굳이 사서 볼 필요는 못 느낀다.
몇몇 언론매체에 칼럼을 쓰고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다 보니 ‘시사평론가’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라디오는 괜찮은데 TV 출연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최근에는
‘토씨(Tosee)’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누리꾼들과도 소통하고 있다.
지난해 말 대학 학보사 송년회에 다녀왔다는 그는
“내가 60년대 학번 선배들 보면서 느꼈던 막막함을 현역 후배들이 나 보면서 느끼는 것 같더라.”면서
격세지감을 토로했다.
“모범생이었죠.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영어만 나오면 주눅이 들어요.”
김종배는 어린 시절을 충남 대천(현재 보령시)에서 보냈다.
그도 시골동네 10리마다 있다는
‘신동’ 중 한 명이었다.
한 학년에 200명이 채 안 되는 시골 학교에서 곧잘 1등을 하곤 했던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부모님에게 전격
발탁되어
(?) 서울 사는 누나와 함께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영어수업 시간 ‘시골 식 영어발음’를 구사하다가 친구들도 모자라 선생님까지 웃게 만드는
바람에 여린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단다.
그는 “그 바람에 지금도 영어가 엉망”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왜 원양어선에 탈 ‘뻔’ 했나?
그의 ‘얌전한 모범생’ 생활은 대학에 입학하기 무섭게 180도 달라졌다.
1984년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서슬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다.
그만큼 대학생들의 관심과 열정은 반독재, 민주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선배의 꼬임(?)에 빠져 학보사에 들어간 그도 공부와 집회를 거듭하며
‘불량학생’으로 거듭났다.
영어수업은 어릴 적 상처 때문에 ‘아이 돈 노우’와 ‘예스’로 버티고, 시험 때면 시험을 거부해
Repot로 때우기 일쑤였다.
“3학년 때였나. 한 번은 학비가 없어서 미등록 재적될 뻔 했어요. 돈 없으면 그냥 잘리는 거지….
속상해서 학교 뒷산에 올라가 울면서 강소주를 마셨어요.
그런데, 평소에는 데모는 참여도 안하고 도서관에서 착실히 공부만 하던 친구가 갑자기 자기가
받은 장학금을 주더군요.
‘너한테 미안해서 못 받겠다’면서. 그 돈…. 아직도 못 갚았네.(웃음)”
졸업정원제 때문에 학점 나쁘면 졸업도 못하던 시절, 하지만 1988년 2월 그는 8학기 만에 졸업하는 데 성공한다.
꼴찌에서 두 번째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1년 동안 백수로 지냈다.
그렇게 바꾸고 싶던 세상에 편입해 취직하자니 자의식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운동을 계속 하려니 집안 형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에는 대한민국이 싫어서 원양어선 탈 생각도 했어요.”
고향에서 배 타는 사람들을 보며 자랐던 그는 정말로
인천광역시의
선원교육장을 찾아갔다.
‘외국에서 빨갱이 만나면 말도 섞으면 안 된다’는 반공교육도 받았다.
증명사진 근사하게 찍힌
승선허가증도 받았다.
신설동에 있는 선원알선중개소까지 갔다. “동원이냐, 사조냐….”
그러나, 그가 결국 택한 것은 원양어선이 아니라 언론이었다.
당시는 6월 항쟁의 성공으로 언론의 자유가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되면서 언론계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는 학보사 시절부터 독재 권력에 아부하던 ‘주류’ 언론사 기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주류를 떳떳하게 비판할 수 있는 비주류가 체질에 맞았다.
김종배는 1989년부터 기자협회보, 민언련, 전교조, 미디어오늘 등을 오가며 언론비평에 몰두한다.
그러던 중 MBC-라디오의 아침 시사프로그램에 잠깐 출연했던 그는 자신의 ‘바리톤’에 반한 담당PD의 출연제의를 받고 뉴스브리핑을 전담하게 됐다.
그 프로그램은 얼마 후 ‘MBC-FM 손석희의 시선집중’으로 개편됐다.
그러나, 시사평론가 김종배의 뉴스브리핑은 8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지금도 집에 승선허가증 있어요.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웃음)
그 때, 배를 탔으면 지금쯤 뭐 하고 있을까 종종 생각해요.
고기밥이 됐거나, 아니면 스페인? 페루?
뭐 그런데서 피부 까무잡잡한 금발 아가씨랑 살고 있지 않을까요?(웃음)”
활자중독 김종배의 ‘신문 독법’
그의 기상시간은 새벽 3시 30분이다.
일어나서 씻고 방송국에 출근하면 4시 20분.
각 일간지를 훑어보는 데는 30분 정도 걸리고, 방송시작 전까지는 원고를 작성한다.
간 밤에 쏟아져 나온 뉴스들을 읽고 선별, 종합해서 원고를 쓰는 데 겨우 2시간밖에 안 걸리는 셈.
그에게
‘신문 잘 읽는 법’을 한 수 청했다.
그는 신문 읽는 법을 크게
‘묶어서’ 읽는 법과
‘쪼개서’ 읽는 법으로 구분했다.
“먼저
‘묶어서 읽기’. 이슈는 한 가지인데 분야가 달라서 흩어진 사안들이 많아요.
‘대운하’ 이슈만 봐도 어느 건 종합면, 어느 건 경제면, 어느 건 정치면… 이런 식이죠.
묶는다는 것은 그런 내용들을 한 데 모으는 일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한 가지 사안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돼요.
여러 가지 신문을 같은 방식으로 묶어서 읽으면 더 좋고요.”
“쪼개서 읽기는 소설을 분석하듯이 기사도 분석하며 읽는 거예요.
기사가 얼마나 사실을 정확히 다루고 있는지는 정보의 출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취재원 중에 어떤 사람들이 나왔는지 확인하는 것도 도움이 되죠.
종종
Fact(사실)는 달랑 하난데 수많은 코멘트로 둘러싸서 그럴듯하게 만드는 기사들도 있어요.
그런 글들은 주장을 과도하게 몰아가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진실성이 떨어지죠.
‘의도 과잉’은
‘팩트 부족’과 동의어에요.
그 외에 작게는 문장, 크게는 내용구성도 따져보면 공부가 되고요.”
‘인생의 세 가지 길’
“예전에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한 여자가 도둑질을 하다 잡혔대요.
그런데 훔친 물건은 쌀이고, 피해자는 시댁이더군요.
그 사건을 취재한 기자는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고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도둑질을 했다.’라고
정리하며 끝냈어요.
그게 말이 됩니까! 시댁이 퍼줘도 모자랄 판에….
‘스토리’와
‘인물’은 없고,
‘피의자’와
‘피해자’만 있는 기사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되는 거죠.
왜 꼭 사회면에는 범죄자만 등장해야 하나요. 전 일상성을 포착하는 뉴스도 가능하다고 봐요.”
주로 정치 뉴스를 많이 다루는 김종배는 사실 사회면에 관심이 많다.
그는 “앞으로 문학적 감수성이 가미된 사회 기사를 직접 취재해서 써 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건 중심의 뉴스가 아니라 일상, 인생을 포착하는 뉴스 말이다.
꼭 뉴스로 불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것은
‘개인 김종배’가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글이다.
“삶에는 세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잘 하는 일’을 하는 길이에요.
두 번째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 길.
마지막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는 길입니다. 이 세 가지가 통일되면 정말 행복한 인생이겠죠.
그런데, 그렇게 운 좋은 사람은 거의 없어요. 제가 택한 건 세 번째 입니다.”
불혹에 갓 접어든 시사평론가는 잔에 남은 물을 마지막으로 들이키고 코트를 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