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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재밌게 읽었던 책...
내가 고1때 이 책을 읽었다면...인생에 자극을 받았을텐데..
이책을 읽었을 땐...2005년 그러니까....30대 넘은...흑흑...그 나이였따는..
그래도 그녀의 인생기는 나에게 늘 자극이 된다.

 

하버드 우등 졸업으로 화제 모은 박원희&엄마 이가희씨

2004년 민족사관고등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미국 명문대 10여 곳에 합격해 화제를 일으켰던 천재 소녀, 박원희. 그녀가 하버드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좌충우돌 대학생활기를 책으로 펴냈다. 천재 딸을 키운 엄마와 함께한 박원희·이가희 모녀 인터뷰.

당신은 꿈이 무엇인가요?
2004년 민족사관학교를 2년 만에 졸업하고 하버드, 프린스턴, 스탠퍼드 등 미국의 명문대 10곳에 동시 합격해 화제를 모았던 박원희(23). 그녀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 돌아왔다. 자신의 하버드 생활이 모두 담긴 책 「스무 살 청춘! A+보다 꿈에 미쳐라」(김영사)를 들고 말이다.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원희와 그녀의 어머니 이가희씨. 인터뷰를 약속한 카페 안에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예쁜 아가씨와 그녀 못지않게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어릴 때 봤던 미국 드라마 ‘하버드의 공부벌레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며칠 동안 씻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와 마주앉아 인사를 하기도 전에 기자는 ‘세상은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뛰어난 미모의 그녀, 하버드 우수 졸업이라는 완벽해 보이는 성적표를 들고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하버드의 우수 졸업생, 박원희와의 인터뷰가 흔히 들을 수 있는 ‘공부 잘하는 비결’이었다면 ‘그럼 그렇지’라고 실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좀 다른 걸 말하고 싶어 했다. 입시전쟁이 치열한 대한민국 중·고등학교에서는 누구도 과감하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말.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목표(꿈)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왜 하버드여야 하죠?”
2004년 「공부 9단, 오기 10단」이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저자의 대열에 올랐던 그녀. 하지만, 책을 통해 이름이 알려진다는 건 막중한 책임도 뒤따르는 것임을 알게 됐다. 일부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박수를 보냈지만, 일부 사람들은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의 아이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양 책을 썼느냐”며 날선 말들을 던지곤 했다. 이런 곱지 않은 시선들 때문에 그녀는 ‘다시는 책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다시 한번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계기가 있었다. 그건 바로 하버드대 3학년 말, 아이비리그 탐방을 온 특수목적고등학교 학생들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저는 그 학생들에게 캠퍼스 투어 가이드를 해주었어요. 6년 전 제가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은 하버드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죠. 전 그들이 무언가 도전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그들보다 먼저 길을 나선 선배로서 경험담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죠.”

그렇게 투어가 끝난 뒤 그녀는 학생들과 마주 앉아 하버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한 여학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하버드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들어가나요?” 이 질문에 박원희는 “왜 하버드에 들어오고 싶냐”고 되물었다. 그 여학생은 “좋은 학교잖아요”라고 우물쭈물 답했다. “좋은 학교는 많아요. 그런데 왜 하버드여야 하죠?” 이 질문에 여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박원희는 그 후배에게서 ‘자신의 꿈이 000이기 때문에 하버드대를 목표로 한다’는 대답을 듣길 원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 박원희도 그 여학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저 역시 중·고등학교 때는 내 꿈에 대한 분명한 그림 없이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 대학교를 막연히 동경했어요.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해요. 지금 당장 눈앞의 욕심을 채울 수는 있겠지만, 더 긴 미래를 향해 끝까지 치열할 수는 없거든요.”

그녀는 이 책을 쓴 이유가 수많은 학생들이 자신과 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라고 밝혔다. 누군가 그녀처럼, 목적 없는 치열함으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녀는 ‘부디’라는 말로 자신의 경험이 다른 누군가의 미래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간절함을 내비쳤다.

지혜를 얻기 위해 들어오라
박원희는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고 말한다. 그녀가 처음 하버드대학교 캠퍼스를 밟던 날 하버드대 덱스터 게이트(Dexter Gate)에는 ‘Enter to Grow in Wisdom(지혜를 얻기 위해 들어오라)’이라고 씌어 있었다. 처음 이글을 접했을 때는 박원희 자신도, 그 말의 의미를 크게 깨닫지 못하는 신입생이었다.

그녀는 5년 전 자신을 “‘하버드’라는 이름에 미리부터 겁먹은 신입생이었다”고 회상했다. 천재들과의 전쟁터에서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걱정했고, 하버드에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얻을지에 대해 한껏 기대가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랬던 것처럼 하버드에서도 최고가 되기 위해서 누구보다 빨리 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제가 좇던 것이 ‘꿈’이 아니라 ‘학교’와 ‘성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여태까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싸웠던 건지, 한동안 고민에 빠졌죠.”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 하버드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일상생활의 현상을 수식으로 풀어내는 경제학 교수를 보고 있으면 탄성이 절로 나왔고, 관심 분야에 대해 교수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논문을 다듬는 과정도 짜릿할 만큼 놀라운 경험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만족과 즐거움들 속에 ‘목적’은 없었다.

“저를 눈뜨게 한 것은 하버드의 열정적인 친구들이었어요. 주말이면 도심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과외 봉사를 가는 수학 천재, 중국의 시각장애인들이 더 많은 직업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비영리단체를 통해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룸메이트 등 하버드의 천재들은 다양한 가치와 신념으로 움직였고, 그것은 모두 자신만의 ‘꿈’을 향해 있었던 거죠. 저는 그 사실을 매우 늦게 깨달았고요.”

하버드의 천재들이 뿜어내는 열정의 원동력은 바로 ‘그들의 꿈’이었다. 하버드에서 배워야 할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꿈에 대한 지혜’였던 것. 박원희는 이 사실을 깨닫고 난 뒤 “미래에 대한 고민을 더 깊이 했고 그로 인해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 수 있었다”고 말한다.

박원희는 올 여름부터 하버드 교육혁신실험실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또 대학원을 갈 수 있는 성적도 이미 받아둔 상태다. 그녀의 꿈은 ‘교수’다. 젊은 친구들과 함께 원하는 주제를 가지고 실험을 하고 평가를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더 치열해질까.

하버드대학교의 덱스터 게이트의 또 다른 면에는 ‘Depart to Serve better Thy Country and Thy Kind(국가와 인류에 공헌하기 위해 떠나라)’고 씌어 있다. 하버드에서 찾은 인생의 소중한 꿈을 꼭 이룰 수 있길 바란다.

난 딸의 선택을 믿는다
2004년 딸이 10여 곳의 미국 명문대학에 합격하면서 천재 딸을 키워낸 ‘어머니’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이가희씨. 인터뷰 내내 딸의 말을 흐뭇하게 듣고 있던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는 것 같다’는 표정이다.

이렇게 똑똑한 딸을 키우기 위해 엄마는 어떤 역할을 했느냐고 묻자 ‘어릴 때부터 매일 일기를 쓰라고 당부했던 것’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뿐이란다. 영어와 일어는 ‘비디오’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놀이’로 접할 수 있게 도움을 줬다. 하지만 딸아이가 민사고를 2년 만에 조기 졸업하고, 하버드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은 엄마인 이씨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라고.

자유분방한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는 딸에 대한 부모의 걱정은 어쩔 수 없었을 텐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 관리를 했을까. 이씨는 “유학을 가면 자유분방해진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면서 “하지만 딸이 나보다 신앙심이 더 좋아서 컨트롤을 잘한 것 같다”고 딸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이씨는 앞으로 딸이 무엇을 하든 딸의 선택을 100% 믿고 존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딸이 모국을 위해 일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박원희의 좌충우돌 하버드 생활 극복기
영어 극복기
나는 하버드에 입학할 때까지 한 번도 해외 연수를 가본 적이 없다. 오로지 한국에서 배우고 익힌 영어를 사용하며 공부했다. 미국 생활도 처음이라 적응이 힘들었는데, 대화까지 자연스럽지 못해 친구들과 가까워지기가 힘들었다.

특히 다양한 문화권의 영어 억양을 알아들어야 한다는 게 큰 문제였다. 심슨 가족의 이야기나, 미국 연예인들의 이야기는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더욱 대화하기가 힘들었다. 오랫동안 난 주위 사람들이 웃으면, 왜 웃는지도 모른 채 무조건 따라 웃었다. 가끔 짓궂은 친구들은 “너는 왜 웃는데? 뭔지 알기나 해?”, “영어도 못하는데 하버드에는 어떻게 들어왔대?”라며 망신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영어에 대한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자존심’을 버린 것. 친구들이 내 실수 때문에 웃을 때는 같이 따라 웃으면서 올바른 뜻을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하고, 다른 문화권에서 왔다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 주위 친구들은 더욱 친근하게 다가왔다. ‘자존심’를 버리고, ‘친구’를 얻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하버드의 가치
하버드의 학생들은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다르다. 따라서 학점만으로 서로를 평가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가 품고 있는 꿈과 야망을 위해 선택하는 전략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서로의 선택을 존중한다. 학생의 가능성을 학점만으로 평가하는 한국과는 분명 다른 면이 많다는 것을 4년 내내 느낄 수 있었다. 학점보다 자신이 찾는 가치를 찾아 열정을 불태우는 곳, 그곳이 바로 하버드다.

하버드에서의 경쟁은 자기 자신뿐
나는 한 시험에서 한 문제를 틀린 것 같아 “나 망했나봐”라고 울상을 지은 적이 있다. 하지만 며칠 뒤 시험지에는 99점이 적혀 있었고, 틀렸다고 확신했던 문제는 ‘계산 착오’라는 코멘트와 함께 1점이 감점돼 있었다. 한국에서 이런 점수를 가지고 엄살을 떨었다면, 매장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친구들은 “와~ 잘했네. 잘해냈어”라며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었다. 하버드에서의 경쟁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뿐이다. 학생들은 남을 질투하기보다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데 집중한다. 시험을 잘 봤다고 말하면 “잘난 척한다”고 싫어하고, 못 봤다고 말하면 “거짓말한다”고 싫어하던 한국의 중학교 시절. 그 힘든 때가 생각나서 더욱 부럽기만 했던 미국 학생들의 문화였다.

■글 / 김민주 기자 ■사진 / 이성원

Posted by 치즈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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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 의학기자, 아이티 취재 중 집도-출처 헤럴드경제

헤럴드경제 | 입력 2010.01.19 12:32 | 수정 2010.01.19 14:20

지난번에 한 기사에서 읽었고, 방송에서도 본적이 있는 굽타박사...
아..이 멋진 분의 기사를 또 보게 되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인듯...취재한번 보고 나서 오나전...감동먹고 멋있게 보였다는..

-- 헤럴드 경제 기사 원문----

 미국 CNN 방송의 의학전문기자인 산제이 굽타 박사가 아이티 지진 참사 취재도중 12세 아이티 소녀의 뇌수술을 훌륭히 해내 화제가 되고 있다.

신경외과 의사 출신인 굽타 박사는 18일 아침(현지시간) 아이티 해안에 정박 중인 미 항공모함 칼빈슨호에서 이번 지진으로 부상한 소녀의 머리에서 1.2㎝ 크기의 콘크리트 파편을 제거하는 수술을 집도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지난 12일 지진으로 부상한 이 소녀는 칼빈슨 호로 후송된 후 두개골에 파편이 박혔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뇌수술을 할 신경외과 의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던 중 이 소식을 접한 CNN의 한 프로듀서의 도움으로 굽타 박사를 수배할 수 있었다.

굽타 박사는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지진 현장을 취재를 하다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군 헬기 편으로 칼빈슨호로 날아가 항공모함 의료진과 함께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쳤다. 그는 수술 후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면서 "미 해군과 칼빈슨호 의료진의 능력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말했다.

굽타 박사는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공중위생국장 직을 제의받았으나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제의를 고사한 것으로 알려져 유명세를 탔던 인물이다.

헤럴드생생뉴스(online@heraldm.com)
Posted by 치즈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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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듣는 <손석희 시선집중>에 리영희 선생님께서 출연..

엄연히 출연은 아니고 댁에서 인터뷰를 진행....
라디오 들으면서 녹음도 해놨는데...역시 존경할 만한 분은...말씀하나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오게 전달을 하신다는....
어찌 지내시는지...물론 나와 안면도 없는 사이지만, 선생님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떨렸다
오늘 본방도 듣고 녹음한것도 듣고...
밤에는 안운다는 지능적이고 똑똑한 리선생님댁 뻐꾸기 시계가 궁금하다...
나도 하나 필요한데...ㅋ
--------------------------------기사 발췌----------------------------------------

 

리영희 "한국사회, 우익 날개만 커져 걱정"

미디어오늘 | 입력 2009.12.05 14:09 |

 
< 시선집중 > 출연…"정부, 한반도 상황 오판하고 있지 않나"

[미디어오늘 최훈길 기자 ]
리영희(80) 선생이 5일 "걱정스러울 만큼 오른쪽 즉 우익 날개만이 커가고 함께 더불어 기능을 발휘할 좌측 날개는 왜소해지고 위축되는 상황"이라고 한국 사회를 진단했다. 또 "우리 정부가 오히려 경직되고 북에 대한 우월감으로 잘못 한반도 상황을 오판하고 있지 않겠나 걱정된다"며 우려를 전하기도 했다.

리영희 선생은 이날 MBC < 손석희의 시선집중 > '토요일에 만난 사람'에 출연해 '한국 사회는 좌우는 날개로 날고 있다고 판단하는지' 묻는 질문에 "지금은 전혀 아니다"라며 현 정국에 대한 우려를 전했다.

리영희 선생은 '남북 관계에서 한국 정부가 취할 방향성'에 대해선 "미국은 태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며 "북한이 요구했던 평화협정 체결, 정치회담 개최에 대해서 50년 동안 거부해 오던 것에 상당히 접근하려는 표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 현 정부의 '경직된' 대북 정책을 꼬집기도 했다.

이날 인터뷰는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지난 1976년 발간된 '전환시대 논리'가 올라 온 계기로 마련됐다. 리영희 선생은 베스트셀러 배경에 대해 "그런 시대가 안 되길 바랬는데 전진하는 우리 사회 모습을 보길 바랐는데 (사회가)후퇴하니까 그 책에 그런 의견이 생기는 모양"이라고 해석했다.





▲ 리영희 선생.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시사적 문제 이외에도 이날 인터뷰에선 리영희 선생의 삶을 조명하는 질의 응답도 이어졌다. 리 선생은 '삶을 되돌아 볼 때 가장 반성한 부분'에 대해선 "공적인 부분에 있어서 반성해야할 만한 자기 부정해야할 만한 일을 시도해본 일이 없다"면서도 "개인의 가정 생활에서 제 아내와 가족에서 하도 많은 고생을 시켰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반성을 한다"고 밝혔다.

리영희 선생은 또 민주화 운동으로 투옥된 분들에게 "그런 분들을 만날 때 늘 '많은 것에 죄를 지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나서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굉장히 마음 속으로 반성을 한다"며 "부채 의식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으로 리 선생은 "쓰러져서 반신불수 된 것이 꼭 10년인데 좀 더 책을 볼 수 있고 쓸 수 있고 사상을 굴릴 수가 있었다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보탤 수 있는 뭔가 저술을 할텐데 이제 전혀 그런 것을 할 수 없게 됐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로 했다. 한편, 12월 중순, 언론인 등 10여 명은 선생의 삶이 주는 의미를 오늘의 상황에 대입해보는 < 선생 리영희 > (가제·사계절출판)를 발간할 예정이다.

다음은 이날 리영희 선생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벌써 한 10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진 뒤에 거동을 잘 못하고 요새는 만성 기관지염이 재발해서 고생하고 있죠."

- 평소 '내 책이 읽힐 필요가 없어 인세가 0원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소간의 저서와 책들이나 써온 내용들이 시대를 조금씩 앞서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깨우치고, 더 이상 내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전반적으로 의식 수준이 올라왔으면 했다. 그러면 뭐 책을 읽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데)계속 책이 팔리는 것 같아요? 인세가 조금씩 들어오려는 모양인데."(웃음)

- 얼마 전에는 베스트셀러 1위에도 잠시 오르기도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왜 '전환시대 논리'가 통할 수밖에 없을까요. 그 책이 필요한 시대 됐다고 생각하는지요?
"그런 시대가 안 되길 바랬는데 전진하는 우리 사회 모습을 보길 바랐는데 후퇴하니까 그 책에 그런 의견이 생기는 모양이에요."

- 1950년대 중역부터 언론인, 학자, 사회 비평가, 국제문제비평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당시 삶을 지성인에 해당하는 구간이라고 하셨는데 지성인이라고 쓴 특별한 이유는? 지식인과 차별을 두고 말씀하셨는지요?
"임의로 차별을 뒀죠. 요새는 흔히 기술적인 지식인, 전업적인 지식인들이 많은 사회이다 보니까. 사회 공동체, 자기 사회 전체에 대한 관심은 없이 오로지 고도의 기술, 직업적 지식으로 사는 이 사람들을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에요. 지성인은 '개별적으로 살면서 전체 일원으로서 전체 생존과 복지와 운명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면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그런 삶이야말로 지성인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 흔히 얘기하는 진보 진영, 보수 진영을 막론하고 말씀하신 것인지?
"저는 진보 진영, 보수 진영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살아가는 방법, 패턴으로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규정을 해서 무슨 '주의' 이런 식의 표현을 싫어하기 때문에 진보, 보수를 초월해야죠."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책을 쓰신 바 있다. 그때는 좌우로 나눠서 말씀하셨다.
"한국 사회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정치 철학에서 좌우(용어를) 흔히 쓴다, 그런 의미에서 쓴거죠."

- 한국 사회는 좌우의 날개로 날고 있다고 판단하는지요?
"지금이야 전혀 아니죠. 어떻게 될거냐 걱정스러울 만큼 오른쪽 즉 우익 날개만이 커가고 함께 더불어 기능을 발휘할 좌측 날개는 왜소해지고 위축되는 상황이라고 봐야죠."

- 그런 속에서도 왼쪽 날개라고 표현할 수 있는 진보진영은 늘 그런 비판 받아왔습니다만 분열한다는 비판이 있다. 어떻게 나가야 할지?
"세계 정치사를 보면 우익이라는 세력은 이해 관계 말하자면 뭘 가지고 더 먹고 덜 먹고 하는 것으로 분열해요. 소위 좌익이라는 세력은 먹을 것으로 싸우다 분열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념·이론의 세분화를 극단까지 몰고 가는 그런 나쁜 성향이 있어서 분열하고 자멸한다. 두 가지 별도의 대립하는 양상이다. 오히려 우익이라는 것이 가지는 폭력성이 있지만 그들이 하나가 되려는 모범을 좌측이 채택하고, 우측은 또 먹을 것을 쟁탈하는 데서 생기는 그런 것을 이론적인 좌측의 형태에서 배우고 이렇게 하면 쌍방이 다 이로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작은 틀로 옮겨가려면 우리 현실 정치로 옮겨가야 하는데 그 질문까지는 안 드리겠다. 70년대 대학시절 선생님의 사상 매료된 사람들은 '의식화의 은인'이라고 했고 반대는 이런 말씀 드려 죄송하지만 '의식화의 원흉'이라고도 했습니다.
"오랜 시간 그래왔다. 조금도 듣기 거북한 것 없어요."

- 70·80년대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사상에)영향 받아 민주화 운동도 했고 감옥에도 다녀왔다. 부채 의식이 있으신지요?
"부채 의식이 있죠. 그런 분들을 만날 때 늘 '많은 것에 죄를 지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나서 도덕적으로 인간적으로 굉장히 마음 속으로 반성을 하는거죠. 그러나 죄의식이라는 표현까지는 아니고 시대의 한 사회에서 한 시대가 변화를 요구할 때 일어나는 일반적 현상이에요. 그래서 나도 역시 그 속에서 시대가 운명적으로 요구하는 그 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거고 또 내 저서나 발언이나 사상에 공감해서 그런 어려움을 겪었던 젊은이들도 그 시대의 산 사람으로서 시민으로서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의 길이었다고 봐요."

- 당시 젊은이들도 선생님께 부채의식 가지라는 분은 없을 것 같다. 고향이 평안북도신데, 누님 만나신 것이 98년도? 고향에는 누님이?
"그쪽 당국자들이 어렵게 무명의 농사꾼 조카를 찾아내 가지고 평양가지 데려와 만났죠, 누님은 벌써 가셨죠."

- 리영희 선생님 댁에서 인터뷰하기 때문에 뻐꾸기 시계(소리)가 정감 있네요. 밤에도 이렇게 울리면?(웃음)
"뻐꾸기가 현명해서 해가 떨어지고 어두우면 안 울어. 잘 만들었어요."(웃음)

- 요즘 남북관계도 조금 잘 안 풀리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고요, 특히 남북 관계에서 한국정부 취할 방향성을 어떻게 봐야 될까요?
"미국은 태도 변화가 있을 것이에요. 미국은 북한이 요구했던 평화협정 체결, 정치회담 개최에 대해서 50년 동안 거부해 오던 것에 상당히 접근하려는 표시가 있을 거 같아요. 우리 정부가 오히려 경직되고 북에 대한 우월감으로 잘못 한반도 상황을 오판하고 있지 않겠나 걱정됩니다."

- 리영희 선생님 삶을 관통하는 팔십 평생 지켜오신 신념은 어떤 걸까요?
"흔히 얘기되는 거지만 검소한 생활(simple life)과 이념적으로 사고를 높이 가지는 거(high thinking)죠.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설명하기 힘들지만 가령 흔히들 유행들이 많잖아요. 어느 정도 (살만)하면 골프 쳐야 하는 등 물적·세속적 자기 방기를 거부하는 거죠. 그런 것을 치워 검소하게 생활해야 사유·사고의 도덕적·논리적 수준의 높이를 순수하게 높여갈 수 있지 않나."

- 삶 되돌아 볼 때 가장 반성하신 부분은?
"공적인 부분에 있어서 반성해야할 만한 자기 부정해야할 만한 일을 시도해본 일이 없습니다. 개인의 가정 생활에서 제 아내와 가족에서 하도 많은 고생을 시켰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는 반성을 하죠."

- 9번 연행되셨고, 5번 구치소에 수감되셨고, 재판도 많이 받으셨고, 언론계에선 두 번 그만두셔야 했다.
"대학가서도 박정희 때 쫓겨났다 죽고 나서 복직하고, 전두환 들어오자 쫓겨나고 말기에 복직됐다. 그런 생활이다 보니까 나는 한국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제도화된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완전 아웃사이더였던 셈이죠. 밤낮 쓴 소리하는 말이 권력자들의 비위나 거슬리고 함으로써 스스로 그 체제 안에 머물기를 거부했던 까닭으로 제 자신이 고생 많이 한 거죠."

- 사모님께 빚을 많이 갚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아요. 나이 들수록 일생 같이한 젊었을 때 고생에 대해선 참 갚아질 수가 없어요. 아무리해도."

- 요즘은 갚으시면서 사시죠?
"그럴려고 삽니다. 요새는 그렇게 삽니다. 비로써 가족과의 삶 되려고 할 때 병이 들어 쓰러지니 조금은 안타깝죠."

- 뭔가를 조금 더 앞으로 한 가지라도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쓰러져서 반신불수 된 것이 꼭 10년인데 좀더 책을 볼 수 있고 쓸 수 있고 사상을 굴릴 수 가 있었다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보탤 수 있는 뭔가 저술을 할텐데 이제 전혀 그런 것을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에."

- 책 읽고 싶다고 했는데 기자 시절에도 엄청난 독서했다고 들었습니다.
"꼭 공부만을 위주로 산 사람은 아닌데 술도 많이 했고 방탕도 많이 했고 남과 다름없이 그냥 살아오면서 한가지 무지하게 독서를 한 것만은 사실이에요. 원고료가 조금 들어오면 서점에 가서 신간들 못 본 것을 꾸려서 집에 들어오는데 밤에만 와. 대문 밖에 책 꾸러미를 놓고 대문 두들겨 들어가요.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고 다시 (문밖으로)나와서 책 꾸러미를 들고 가요. (그걸)보면은 집사람, 어머니가 '식구들은 어떡하고 책만 사온다'며 좋아하지 않은다고. 그런 수법으로 해서 독서를 많이 했죠."

- 최근 읽으신 책은?
"눈 때문에 그렇고 종기로 쇠약하니까 오랜 시간 못 보죠."
- 레미제라블을 다시 원서로 떼셨다고?
"1800 페이지인데 형무소 들어가서 읽은 것을 한 20년 지나서 또 한번 읽고 싶어져서."

- 방송 듣는 많은 젊은 분들이 좌절할 것 같습니다. 들어올 때 보니 아파트 문패가 걸려있어서요. 거신 이유가 혹시 있으십니까.
"난 언제나 개인의 권위, 인격, 독립적 사유, 판단, 가치 이런 걸 중요시하기 때문에 집단으로서의 국가보다 개인, 인간의 중요성을 더 앞세워요. 그렇게 거창하게 나가지 않더라도 7년 동안을 6·25 군인으로서 군번으로 살아왔어요. 남들은 3년 반하니까 제대했는데 왜 그랬냐면 연락 장교 흔히 통역 장교로 잘하니까 (군에서)안 놔주었죠. 휴전되고도 못 나왔다고요. 7년을 했어요. 7년 동안 동조하지 못하고 굴복한 채 번호로만 불렀다고요. 나의 가치는 없고. 그 다음에는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여러 차례 형무소를 드나들면서 그때마다 소위 수번호로 가슴에 다 번호를 적어 가지고 불리었고. 번호가 나를 대신했어. 그것이 내가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를 입은 거야. 그것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라면 (문패를)했다면 되지도 않는 거지만 (그래도)싫으니까 번호보다 내 이름 문패 걸어놓은 거죠."

- '전환시대 논리'라는 책이 뜻하지 않게 베스트셀러 된 그런 시대에 어떤 말씀 주고 싶으신가요?
"괴테가 후배들의 동료 문학인들의 충고를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의 충고를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전제 하에서 충고를 하겠다고 이랬거든요. 10년, 20년 사이 변화도 막 심하고 내일 어떻게 될지 자연 현상까지 포함해서 정치 제도의 변화도 그렇거니와 누가 감히 자신을 가지고 예견하고 그에 따라오는 삶에 대해 권고를 하거나 충고를 자격이 없다고 봐요. 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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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앞을 가려서 일기를 읽기가 힘들다.
특히 1월 11일자 일기를 읽으니 인간 김대중 , 남편으로서의 김대중 대통령 너무 존경스럽다..
멋지신 분이다...김구선생님 다음으로 존경하시는 분이다...
사랑합니다. 좋은 곳에서 편히 쉬세요...찬미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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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김대중 전 대통령 '일기'-1.2

머니투데이 | 심재현 기자 | 입력 2009.08.21 08:53 | 수정 2009.08.21 09:52

 




[머니투데이 심재현기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생전 일기 일부가 공개됐다.
김 전 대통령의 유족측은 21일 오전 공식 추모홈페이지에 김 전 대통령이 생전에 쓴 일기의 일부를 게재했다.

이번에 공개된 일기는 김 전 대통령이 올해 1월1일부터 입원하기 1달 전인 6월4일까지 쓴 내용 가운데 일부다.

다음은 김 전 대통령의 일기 전문.
2009년 1월 1일
새해를 축하하는 세배객이 많았다. 수백 명. 10시간 동안 세배 받았다. 몹시 피곤했다. 새해에는 무엇보다 건강관리에 주력해야겠다. '찬미예수 건강백세'를 빌겠다.

2009년 1월 6일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2009년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2009년 1월 11일
오늘은 날씨가 몹시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둘이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매일 매일 하느님께 같이 기도한다.

2009년 1월 14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다.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다.

2009년 1월 15일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들고 살아왔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 살아왔다.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

2009년 1월 16일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

2009년 1월 17일
그저께 외신기자 클럽의 연설과 질의응답은 신문, 방송에서도 잘 보도되고 네티즌들의 반응도 크다. 여러 네티즌들의 '다시 한 번 대통령 해 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

2009년 1월 20일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2009년 1월 26일
오늘은 설날이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귀성길을 오고가고 있다. 날씨가 매우 추워 고생이 크고 사고도 자주 일어날 것 같다.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2009년 2월 4일
비서관회의 주재. 박지원 실장 보고에 의하면 나에 대해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100억 CD) 대검에서 조사한 결과 나는 아무런 관계없다고 발표. 너무도 긴 세월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 받을 것. 그 의원은 아내가 6조 원을 은행에 가지고 있다고도 발표, 이것도 법의 심판 받을 것.

2009년 2월 7일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2009년 2월 17일
명동성당에 안치된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 앞에서 감사를 드리고 천국영생을 빌었다. 평소 얼굴 모습보다 더 맑은 얼굴 모습이었다. 역시 위대한 성직자의 사후 모습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

2009년 2월 20일
방한 중인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출국 중 전용기 안에서 전화가 왔다. 그는 전화로 1. 클린턴 대통령의 안부 2. 과거 자기 내외와 같이 있을 때의 좋았던 기억 3. 나의 재임시의 외환위기 수습과 북한 방문시 보여준 리더십 4. 다음 왔을 때는 꼭 직접 만나고 싶다 5. 남편 클린턴 대통령도 나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힐러리 여사가 뜻밖에 전화한 것은 나의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 표명으로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에 대한 메시지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무튼 클린턴 내외분의 배려와 우정에는 감사할 뿐이다.

2009년 3월 10일
미국의 북한 핵문제 특사인 보스워스 씨가 방한했다가 떠나기 직전 인천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개인적 친분도 있지만 한국 정부에 내가 추진하던 햇볕정책에의 관심의 메시지를 보낸 거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2009년 3월 18일
투석치료. 혈액검사, X레이검사 결과 모두 양호. 신장을 안전하게 치료하는 발명이 나왔으면 좋겠다. 다리 힘이 약해져 조금 먼 거리도 걷기 힘들다.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 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

1. 봉건시대는 농민은 무식하고 소수의 왕과 귀족 그리고 관료만이 지식을 가지고 국가 운영을 담당했다.

2. 자본주의 시대는 지식과 돈을 겸해서 가진 부르주아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절대 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3. 산업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도 교육을 받고 또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노동자와 합류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2009년 4월 14일
북한이 예상대로 유엔 안보리의 의장성명에 반발해 6자회담 불참, 핵개발 재추진 등 발표. 예상했던 일이다. 6자회담 복구하되 그 사이에 미국과 1 대 1 결판으로 실질적인 합의를 보지 않겠는가 싶다.

2009년 4월 18일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와 인척, 측근들이 줄지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 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

2009년 4월 24일
14년 만에 고향 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 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도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

2009년 4월 27일
투석치료. 4시간 누워 있기가 힘들다. 그러나 치료 덕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 크게 감사. 나는 많은 고생도 했지만 여러 가지 남다른 성공도 했다. 나이도 85세. 이 세상 바랄 것이 무엇 있는가.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 ─ 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 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2009년 5월 1일
이제 아름다운 꽃의 계절이자 훈풍의 계절이 왔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 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 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2009년 5월 2일
종일 집에서 독서, TV, 아내와의 대화로 소일. 조용하고 기분 좋은 5월의 초여름이다.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 아내와 좋은 사이라는 것이 행복이고 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생활에 특별한 고통이 없는 것이 옛날 청장년 때의 빈궁시대에 비하면 행복하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 관계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

2009년 5월 18일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내한한 길에 나를 초청하여 만찬을 같이 했다. 언제나 다정한 친구다. 대북정책 등에 대해서 논의하고 나의 메모를 주었다. 힐러리 국무장관에 보낼 문서도 포함했다. 우리의 대화는 진지하고 유쾌했다.

2009년 5월 20일
걷기가 다시 힘들다. 집안에서조차 휠체어를 탈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좋은 아내가 건강하게 옆에 있다. 나를 도와주는 비서들이 성심성의 애쓰고 있다. 85세의 나이지만 세계가 잊지 않고 초청하고 찾아온다. 감사하고 보람 있는 생애다.

2009년 5월 22일
버마 혁명민주지도자 등 수 명이 내방. 민주화에 대해서, 나는 "버마는 외국의 지지는 충분히 얻고 있으니 이를 활용해서 안에서 국민이 자력으로 쟁취하도록 노력하시오"라고 격려했다.

2009년 5월 23일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 ─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2009년 5월 24일
노 대통령 장례식을 정부와 측근들은 국민장을 주장하는데 가족은 가족장을 주장해 결말을 못 보았다. 박지원 의원 시켜서 '노 대통령은 국민을 위해 살았고 국민은 그를 사랑해 대통령까지 시켰다. 그러니 국민이 바라는 대로 국민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전했는데 측근들이 이 논리로 가족을 설득했다 한다.

2009년 5월 25일
북의 2차 핵실험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태도도 아쉽다. 북의 기대와 달리 대북정책 발표를 질질 끌었다. 아프가니스탄 , 파키스탄 에 주력하고 이란, 시리아, 러시아, 쿠바까지 관계개선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한만 제외시켰다. 이러한 미숙함이 북한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심을 끌게 하기 위해서 핵실험을 강행하게 한 것 같다.

2009년 5월 29일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

2009년 5월 30일
손자 종대에게 나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이웃사랑이 믿음과 인생살이의 핵심인 것을 강조했다.

2009년 6월 2일
71년 국회의원 선거시 박 정권의 살해음모로 트럭에 치어 다친 허벅지 관절이 매우 불편해져서 김성윤 박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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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늦깎이 영어배워 책낸 정희주
출처-http://www.fntoday.co.kr/news/articleList.html?sc_section_code=S1N55
2009년 06월 15일 (월) 09:56:06 김명수 기자people365@paran.com
영어공부라면 이사람에게 물어보라. 정희주(42). 영어를 배우고 싶어 미국에 건너가서 겪었던 일화를 먼저 들어본다.

에피소드 하나. 미국 식당에 갔는데 포크는 없고 스푼만 있었다. 종업원을 불러 포크를 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내손을 잡고 끌고가 고기덩어리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포크라고 하는 것이다. 삼지창 포크를 달라고 한 말인데 웬 돼지고기 덩어리냐고 물었다. 말이 안통했다. 종업원에게 손가락으로 삼지창 신호를 하니까 그제서야 '아 fork(f사운드)' 하면서 포크를 갖다주었다. f사운드를 확실하게 발음해주지 못해서 돼지고기 pork(p사운드)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에피소드 둘.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학교 여자영어선생을 만났다. 당신 더 멋있어졌다는 뜻으로 you look better를 썼다. 그랬더니 고마워하기는 커녕 황당해 하는 것이었다. 칭찬을 해줬는데 황당하게 받아들여서 기분이 안좋았다. you look better는 '너는 과거에는 별로 안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멋있어 보인다'는 뜻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옳은 영어는 'you look nicer'이다. 그뜻은 '너는 과거에도 멋있었는데 지금은 더 멋있어졌다'는 뜻이다.

에피소드 셋. 미국에서 남편의 성기를 자른 아내가 있었다. 보비트사건. 왜 TV에서 peanut(땅콩)이라는 얘기를 자꾸 하는지 이유를 알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했다. 생긴모양이 비슷해서 속어로 땅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착각했다. 수업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여자 영어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왜 보비트사건에 연관되어서 peanut(땅콩)이라는 단어가 자꾸 나오는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여선생이 깔깔깔 웃으면서 그것은 peanut(땅콩)이 아니고 pennis(페니스)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온 여선생님의 말은 더 걸작이었다. 학생이 만약 남자의 그것을 보고 땅콩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무척이나 화를 낼 것이다. 왜?했더니 땅콩은 너무 작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찌나 황당했던지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에피소드 넷. 어떤 뷔페식당에 스테이크를 딱 두덩어리만 잘라준다는 규칙이 붙어있다. 당시 영어가 서툴러서 무슨뜻인지 몰랐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정량인 두덩어리를 먹은후 다시 고기 잘라주는 종업원에게 다가갔다. 그랬더니 'you are pushing me'라고 짜증섞인 말을 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 지금 고기를 더달라고 강요하고 있어'라는 뜻이었는데 그말을 알아듣지 못했던 나는 '그래요(yes)' 해버렸다. 이말이 나오자 마자 당황한 것은 그 종업원이었다. 순간 할말을 잊고 있던 그친구는 똥씹은 표정으로 고기 한점을 썰어주었다. 다시 가서는 안되는데 접시를 가지고 더달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고기 한점을 더 썰어준 것이다.

그의 성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좀 복잡한 사람. 한때는 조선일보 광고상이나 한국일보 광고상을 휩쓸던 잘 나가는 카피라이터였다. 어느날 훌쩍 미국으로 건너가 주변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통·번역에 출판사일을 겸하며 책을 쓰기도 하는등 한마디로 종잡을수가 없다.

한이 맺혔던 영어를 어느 정도 통달했고 미국에서 4년 동안 있으면서 미국의 문화를 만나고 좀 더 큰 세계를 접했다는데서 그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만 아직 그에게는 차도 집도 아내도 없다. 그야말로 빈털털이 인생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새로운 뭔가를 경험하고 또 새로운 뭔가를 창출해내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아직도 실패작은 아니다.

외국인 회사에서 안정된 샐러리맨으로 지내던 그는 돌연 사표를 던졌다. 자신의 인생목표를 수정하기 위해 1993년 어느날에 내린 결단이었다. 전셋집을 정리한 돈과 퇴직금만 달랑 들고 혼자서 김포공항을 떠났다. 유학이라면 상당히 늦었다고 볼수 있는 34살의 나이에 떠나는 만큼 각오가 대단했다. 영어를 못했다. 그래서 미국에 건너갔다. 오직 공부에만 매달렸다. 막상 와서 보니 한국에서 배운 영어와 미국에서 가르치는 영어에 많은 차이가 있어 놀랐다. 영어책을 써야 겠다는 생각이 늘 자리잡고 있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도서관으로 향한다. 낮12시까지 공부하고 점심식사. 미국 시애틀에 자리잡은 University of Washington의 랭귀지 프로그램 수업을 듣고 나면 오후 5시. 기진맥진한 몸을 끌고 집으로 와 저녁을 먹은 후 다시 도서관으로 향하면 대략 오후 7시가 된다. 밤 11시까지 엄청난 양의 숙제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12시가 된다. 샤워를 하고 다시 책을 잡으면 새벽1시 2시도 좋았다.

영어를 정복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겨냈다. 항상 도서관 불빛이 꺼질 때까지 영어와 씨름하던 기억과 처음으로 대학에서 점심을 먹었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낯설음. 점심을 준비해 갔으나 학생식당에서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캠퍼스 한 구석에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마침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문뜩 무슨 청승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자리를 학생식당으로 옮겼다. 물을 어떻게 먹는지 그리고 어디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또 얻는지 난감하기만 했다. 다른 학생들이 어떻게 하는지 관찰하기로 마음먹고 그대로 했다. 그렇게 처음 하루는 지나가고 새로운 공간들은 차츰 자신의 공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가족과 친구들 생각도 많이 났다. 자연스레 스며드는 외로움과의 싸움이 제일 힘들었다. 그럴 때 책을 꺼내 들었다. 처음 30분동안은 힘들지만 이내 배움과 성취의 기쁨속에 그 외로움은 사라졌다. 한국에서 마련한 돈은 3년만에 바닥이 났다. 공부를 그만두기로 했으나 아는 분이 돈을 빌려줘 계속할 수 있었다. 늘 배가 고팠다.

부모님의 돈으로 공부하는 유학생들이 부러웠다. 매주 일요일에는 반드시 조깅이나 수영으로 일주일의 피로를 풀었고 이 습관은 지금도 계속된다. 일단 몸이 튼튼해야 다른 일도 잘 한다는 신념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런공부도 랭귀지 과정 끝나고 입학한 Western Washington University MBA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1995년에는 Western Washington University의 MBA과정에 입학했다. 또다른 시련과 도전의 시간이었다.

C학점을 받으면 대학원장으로부터 경고의 편지를 받는다. C학점이 3개이상이면 학교를 떠나야 한다. 첫 학기가 끝나고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러한 압박감과 불안감 그리고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수업을 따라 가기 위해서는 잠을 줄여야 했다.

딱딱하고 어려운 경제학을 영어로 이해하려니 답답하기만 했다. 방학기간 텅빈 학교도서관에서 파묻혀 지 냈다. 다음 학기에 필요한 책을 미리 구입해 익혔다. 두 과목의 책을 읽고 나니 감이 잡혔다. 아무도 없는 텅빈 도서관에 홀로 남아 공부했던 순간은 짭짤한 재미를 느꼈던 시절이었다.

영어와 미국 문화를 배우기 위해 유학온 만큼 가급적 많은 미국학생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그때 사귄 미국친구들과는 지금까지 자주 연락을 주고 받을정도로 우정이 끈끈하다. 우정을 떠나 단지 영어실력을 쌓기 위해 미국학생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런 집요한 열정 때문에 그의 영어실력은 눈부시게 향상되었다. 그리고 미국문화를 속속들이 아는데 도움이 되었다.

4년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인 학생들과의 만남은 가급적 피했다. 비싼 외화 낭비하면서 미국에 온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영어로만 승부를 걸고 싶었다.

1996년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시던 부친이 돌아가셨다. 왜 이런 일이 하필이면 자신에게 일어났나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유학생활을 중간에서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 외롭고 힘들어 한국으로 전화했을 때 '끝까지 해내야 남자다. 응 그래야 남자야' 라고 격려해주시던 아버님의 말씀이 생생하다.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한적이 없는 분이다. 아버님이 해주신 말씀을 떠올리며 힘과 용기를 얻곤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님의 장례를 치렀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려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께서 "결혼하기 전에 꼭 배우고 싶은 공부를 다해라. 돈을 전혀 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신 생전의 말씀이 떠올랐다. 물질적으로는 형편이 어려워 어쩔수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아버지였다.

아버님의 장례식에 친구가 한 명도 오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문제는 시차. 17일에 미국으로 떠나면 그곳에서 다시 17일을 맞지만 반대로 한국으로 오게 되면 하루가 없어지고 만다. 임종하시던 날 연락을 받고 부랴 부랴 한국으로 왔으나 도착하고 보니 새벽 1시. 그 날이 바로 출상이었다. 또 집에서는 공부에 방해될까봐 병환을 알리지 않다가 임종만 알려 친구들에게 전화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라리 미국에서 떠나기 전, 한국의 친구들에게 미리 전화라도 해둘걸하는 후회가 막심했다. 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회사에서 보내주는 화환조차 없었다. 두고 두고 마음에 걸렸다.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천추의 한이 되고 말았다. 장례를 마치고 다시 미국에 돌아오니 해야할 공부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뤘다고 해서 결코 시험을 보지 않게 하거나 숙제를 경감해주지 않는 미국교수들이 야속했다. 그러나 이런 예외없는 규정은 그 자신을 더욱 강하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 그가 미국에서 얻은 가장 큰 재산은 영어도 MBA 지식도 아닌 독립심과 자신감이다. 그리고 짬을 내는 대로 기차여행을 하고 유스호스텔에 묵으면서 느꼈던 미국에 대한 경험이라고 한다.

1997년. 그는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 마케팅부서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한 경력이 없어 수많은 인터뷰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나이가 많은 것도 걸림돌이었다. 한 미국회사의 미국인 사장은 그의 취업을 거의 결정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이사의 반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미국인 사장은 그의 가능성과 잠재능력을 본 반면에 한국인 이사는 단지 경험만을 보고 그를 판단했다.

그리고 IMF 사태가 왔다. 그는 미국에서 생활한 경험을 살려 '왜 우리들은 광화문에서 키스를 할 수 없을까'라는 책을 펴냈다. 출판사에 원고를 팔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경영까지 해보고 싶었다. 생각대로 팔리지 않았다. 자신의 영어실력을 밑천삼아 후배사무실 한 구석에 책상을 놓고 통·번역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4년전부터 마음먹었던 영어책을 쓰기 시작했다. 2000년. 드디어 1년여의 세월을 거쳐 영어책을 내놓았다. '영어실력 100배로 늘리기'. 영어를 못했던 그러나 이제 상당한 실력을 갖춘 자신의 경험을 살린 책의 제목이다. 그의 또다른 변신인 셈이다.

그는 어찌보면 늘 꿈을 꾸는 몽상가다. 다 잡은 커다란 고기를 상어에게 뺏기고 나서 다시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와 노는 꿈을 꾸는 '노인과 바다'의 한 장면을 좋아한다. 헤밍웨이가 살던 집을 방문하기도 한 그는 그 옆에 조그만 집을 구입해 가끔씩은 그곳에서 글을 쓰고 휴식을 취하고 싶은 꿈을 꾼다. 꿈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는 말도 있듯이 그에게 있어서 꿈은 또다른 시련과 도전 그리고 성취의 시작이다.

반격이란 단어를 좋아한다는 그는 인생의 반격을 노리며 성공에 대한 진행형을 지금도 계속 만들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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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코리아/김명수기자 www.pkorea.co.kr>
http://www.fntoday.co.kr/news/articleList.html?sc_section_code=S1N55(출처)
Posted by 치즈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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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IN&OUT] 팔순에 美 유학길 오른 권노갑

[2009.02.26 21:19]     


“건강 허락되면 박사학위에도 도전”

당나라 시인 두보는 그의 작품 '곡강(曲江)'에서 '人生七十古來稀(인생 칠십 사는 것은 드물다)'라고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08년 내놓은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79.1세다. 이제 70세는 흔하고 팔십은 되어야 노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80세를 '산수(傘壽)' '장조(杖朝)' 등으로 부른다. 이러나저러나 인생 팔십은 아무래도 무엇을 펼치기보다는 정리하는 나이다. 그런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 80세에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냥 놀러가는 유학(游學)이 아니라 진짜 공부하러 가는 유학(留學)이라고 한다. 젊은 세대를 부끄럽게 한다.

1930년 2월18일 생이니 우리 나이로 팔순이다. 그는 이달 28일 1년간의 일정으로 미국 하와이 대학교 아시아 센터(Center for Asian Study)로 떠난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만난 권 전 고문은 80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색이 좋았다. 아무리 봐도 60세 후반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 그는 요즘도 골프를 치면 36홀을 돈다고 한다. 골프 코스를 두 바퀴 도는 셈이다.

-왜 이렇게 늦게 공부를 하려고 하세요?

"공부가 정말 재미있어요. 정말입니다. 내가 김 전 대통령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분에게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을 배웠어요. 친구들이 나보고 그래요. '그 나이에 건강이나 유지하고 잘 놀면 되지 무슨 공부냐?'라고 그러는데 나는 그런 사람을 보면 참 딱해요. 배우는 희열이 정말 커요."

-80세이신데 암기력이 따라주나요?

"문제없어요. 나이가 먹으면 암기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영어문장을 외워도 단어를 외워도 잘 안 잊어버려요." 그는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미국 대학 수업을 따라갈 수 있으세요?

"듣기는 3분의 2 정도 따라갈 것 같고요. 읽기는 90% 정도 되고, 가장 어려운 것이 쓰기인데 노트북을 사서 가요. 내가 미군부대 근무할 때 타이프

라이터를 써서 치는 데는 문제가 없어요. 15대 국회 때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에 가서 잠깐 공부했는데 녹음한 다음에 풀어서 공부했어요. 이번에도 그렇게 해야 할 겁니다."

-떠날 준비가 바쁠 텐데 요즘도 영어 공부하세요?

"그럼요. 집에 밤 10시쯤 들어가면 그때부터 밤 12시, 어떤 때는 새벽 2시까지 하죠. 뉴스위크지와 일간 영자지들을 읽었어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 '나의 삶(My Life)'을 비롯해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들의 자서전도 다 읽었어요."

-1년만 하고 오실 겁니까?

"아뇨. 실력을 늘려서 1년 뒤에 대학원 영문과로 편입할 계획입니다. 아직은 영어가 조금 부족하거든요. 그리고 실력과 건강이 허락한다면 박사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80세 노인의 욕심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박사과정에 도전할 것이냐고 다시 묻자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미국의 대학이 약 3400개 정도 된다. 왜 하필이면 하와이 대학이냐고 물었다.

"얘기가 길어요. 처음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대학원에 가려고 했어요. 억울한 옥살이 후 교도소에서 출감해 강남 이익훈 어학원에서 꽤 공부를 했어요. 외대를 가려니까 토플에 입학시험도 봐야 한대요. 나는 토플 공부는 안 했거든…. 그래서 연세대 대학원 영문과로 가려고 했더니 GRE와 토플을 요구해요. 김모 전 총장은 입학시켜주고 싶었는데 일부 교수들이 '특혜' 시비가 일어날까 봐 꺼리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뒀지."

-그래서 하와이대학을 선택하게 됐군요?

"2008년 7월에 하와이대학에 가서 교수들을 만나며 공부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시안 연구센터에 와서 1년을 공부하라는 거예요. 이른바 방문교수 자격을 준거지요. 토플과 GRE를 1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원 영문과로 편입을 할 생각입니다. 그 후 미주리 대학도 방문했는데 거기는 공부보다 나보고 강의를 해 달래요. 조금 조건이 까다로워. 그래서 순수하게 공부를 하려고 하와이 대학을 택했어요."

- 혼자 가시나요? 아니면 사모님이랑 가시나요?

"나 혼자 가요. 우리 집사람은 돈 벌어서 내 학비를 대야 하지. 아내가 이번에 재정 보증해 주고 신용카드 만들어 주고 그랬어요. 집사람에게 미안해요."

부인 박현수 여사는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미대를 졸업하고 뉴욕대학원에서 공부한 인텔리다. 그녀는 남편과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영등포와 강남에서 돈까스집과 비빔밥 집을 운영한다.

-원래부터 영어를 잘하셨나요?

"동국대 경제학과에 입학을 해서 부전공으로 영문학을 했지요. 6·25 때 부산에 가서 미군 부대 일하면서 영어를 배웠고 수복 후 서울에 올라와서 반도호텔에 있던 미국무역주식회사(America Trading Company)에 다녔어요. 그 후 어머니께서 위독하시다고 해서 1957년 목포에 내려가서 61년까지 목포여고에서 영어선생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지요. 공채로 들어갔어요. 그후 DJ가 인제 보궐선거에 나갈 때 그분을 도우면서 정치권으로 왔어요."

-교도소에서도 공부를 했다면서요?

"정대철 전 의원이 넣어준 토인비의 영문판 '역사 연구'를 영어 사전을 찾으면서 읽었어요. 감옥에서 한 300권은 읽은 것 같은데…. 그곳에서 정말 공부를 많이 했어요. 물론 답답한 때도 있었지만 돌아보면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공부에 열정을 갖고 계신데 자녀도 공부를 잘했겠네요?

"아내가 고생하며 잘 키워줬어요. 첫째가 딸(수현·40)인데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대학에서 비주얼 아트를 전공했어요. 아들(정민·39)은 한양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하고 워싱턴대학에서 재료공학 석사를 했어요. 다 제 밥벌이를 잘하고 있어요."

80세 노정객은 "꼭 박사학위까지 받고 오시라"는 인사에 문밖까지 나와서 전송하며 "하와이에 한번 꼭 놀러 오라"고 손을 내밀었다.

ryol@kmib.co.kr
권노갑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분신이다. 29세부터 48년 동안 DJ와 정치역정을 함께했다. 1968년 권 전 고문이 결혼할 때도 DJ가 혼주를 맡았다. 13·14·15대 국회의원과 당총재 비서실장을 역임했을 뿐 DJ집권 때도 권력 전면에는 나서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노무현 대통령 집권시까지 정치적 이유로 5번 교도소에 갔다. 2007년 1월4일 병실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목포상고와 동국대 경제과를 졸업했고 경기대에서 명예박사를 받았다

Posted by 치즈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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